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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이니까…목소리 내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

입력
2023.06.09 04:30
수정
2023.06.09 08:5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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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린 후 숨죽여 산 할머니
희소병 앓던 동생 잃은 아픔 안은 손녀와의 동거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이들이 맞잡은 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남산.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남산.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 빗자루만 본다 / 대걸레만 본다 / 양동이만 본다 // 점점 투명해져 간다 /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 …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숨죽여 기다린다 / 점점 바닥에 가까워져 간다 // 온갖 얼룩을 지우는 얼룩들처럼 / 유령들처럼"

실존하지만 '없는 존재'가 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나희덕의 시집 '가능주의자'에 수록된 '유령들처럼'은 그런 존재를 살펴보게 한다. 청소노동자를 비롯해 우리의 시선이 비껴간 자리에 있는 이들. 시를 통해 그들은 목소리를 얻고 조금이나마 선명해진다.

김멜라(40) 작가의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도 그런 작품이다. 소설은 군사독재 시절 간첩으로 몰렸던 할머니 '사귀자'와 희소병을 앓던 동생을 잃은 손녀 '아세로라'가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춘다. 슬픔과 두려움을 품고서도 다음 하루, 다음 한 시기를 살아내는 그들을 조명하는 글에서, 흐릿했던 존재는 서서히 발광한다. 2014년 등단한 작가 특유의 유쾌한 언어와 장편으로서 스토리텔링의 맛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2014년 등단한 김멜라는 소설집 '적어도 두 번' '내 꿈 꾸세요'를 출간했다. 그간 문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는 문단과 독자가 모두 주목한 동시대 작가 중 하나다. ⓒ온정

2014년 등단한 김멜라는 소설집 '적어도 두 번' '내 꿈 꾸세요'를 출간했다. 그간 문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는 문단과 독자가 모두 주목한 동시대 작가 중 하나다. ⓒ온정

사귀자와 아세로라의 동거는 갑작스러웠다. 사귀자의 딸 부부(아세로라의 부모)가 횡령 사건에 휘말려 도피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세로라는 사귀자의 집을 찾는다. 허름한 남산빌리지 상가 건물에 '명필 교습소'란 간판을 내건, 등기부에 등록도 되지 않은 공간. 일종의 분양 사기를 당하고 세입자로 겨우 버텼지만 그마저도 이젠 재개발로 밀려날 위기다. 어설프고 불안정한 주거 환경 속 할머니와 손녀의 거리는 딱 '동거인' 정도다. 할머니라 불리는 걸 질색하는 사귀자는 '없는 층'의 '없는 사람'으로 지낸 세월이 오래다. 그런 할머니를 동거인이라 부르는 아세로라는 희소 면역질환을 앓던 동생 '칭퉁이'를 잃고 "밥을 먹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아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정을 붙일 수 없는 상태다.

둘의 관계가 달라진 건 아세로라가 사귀자의 행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다. 우연히 발견한 '노란 종이'가 계기가 됐다. 그 종이에는 '하이쎈스'라고 불리던 간첩 사씨가 소시지 부침 등으로 하숙생들을 꾀어냈다는, 일종의 신문보도지침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정말 간첩일까. 사귀자는 간접조작 사건에 휘말린 인물일 뿐이지만 '작은 오해'로 손녀가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서로의 손을 맞잡게 된다.

소설이 집중한 건 무자비한 국가 폭력에 짓눌려 버린 인물들의 좌절과 절망, 죄책감과 고통이 뒤섞이는 과정이다. 사귀자는 남산 아래서 남편과 함께 하숙집을 운영했다. 까막눈인 자신이 그림 그리듯 쓴 글씨도 '명필'이라고 추켜세운 '순영 학생'의 부탁으로 글을 따라 쓴 게 화근이 됐다. 어느 날 들이닥친 낯선 남자는 그 글에 '김일성 만세'가 있었다며 부부를 위협한다. 그가 내민 노란 종이에 적힌 내용대로 내 자식을 간첩 자식으로 만들지 않으려 그의 요구를 따랐다. 하숙집을 한 차례 휩쓸고 간 그 일을 잊으려 애썼던 부부에게 순영 학생의 투신 소식은 벼락 같았다. 그제야 순영 학생이 말한 건 '김일성 만세'가 아니라 '데모크라시(민주주의)'였다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두려움에 긴가민가하며 서명했던 진술서는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도. "없는 말을 지어낸 죄"로 "없는 층"에서 "없는 사람"으로, "이제는 가고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살기로 한 사귀자. 그는 요리도 살림도 센스가 좋다며 순영 학생이 자신을 부르던 별명 '하이쎈스'를 필명으로 삼는다.

없는 층의 하이쎈스·김멜라 지음·창비 발행·332쪽·1만6,800원

없는 층의 하이쎈스·김멜라 지음·창비 발행·332쪽·1만6,800원

작가는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을 기억하려 애쓰는 인물들을 따뜻하게 그렸다. 그래서인지 인물이 처한 현실은 어두울지라도 소설은 퍽 명랑하다. 죽음이 반드시 슬프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님을 경쾌한 시선으로 그린 단편 '제 꿈 꾸세요'에서 보여준 김멜라의 매력을 다시 볼 수 있다. "먹물에 묻혔다가 빤 오래된 붓처럼 푸석한 회색 머리카락"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은 색이 빠져 김치 국물이 묻은 것 같았다" 발랄한 묘사에 웃음도 툭 터진다. 떠난 동생의 시선에서 풀어낸 후반부 대목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환상성 짙은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삶을 한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창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한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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