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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책임, 북한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있다?

입력
2023.06.01 15:00
수정
2023.06.01 17:0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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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 43년 만에 완역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 홍인기 기자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 홍인기 기자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좌파치고 브루스 커밍스(80)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1981년 지은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초래한 책이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기습적 남침'이라는 주류의 단선적 주장을 거부하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누적된 사회 모순의 결과’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일제강점기의 친일ㆍ반일 대립, 해방 후 남북한에서 다르게 진행된 일제 청산, 미 군정의 남북 분단 고착화 등에서 전쟁의 뿌리를 찾았다. 그의 주장은 전통적 역사 해석에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로 불리며 198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다.

강력한 반공 이념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우파 정권으로서는 센세이션 하다못해 체제를 흔드는 불온한 주장이었다. 전두환은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반미 자주노선을 추진하던 운동권은 몰래 책을 돌려보며 투쟁 동력으로 삼았다. 좌우에 따라 환호가 엇갈린 책, 아직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있는 책,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 43년 만에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완역됐다. 한국전쟁 당시 긴박한 상황과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다룬 2권은 아예 처음 번역됐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한반도 긴장을 다시 끌어올리는 지금 시점에서 늦었지만, 시의적절하다.

브루스 커밍스 지음ㆍ김범 옮김ㆍ글항아리 발행ㆍ1권 704쪽(4만 원) 2-1권 624쪽(3만5,000원) 2-2권 656쪽(3만5,000원)

브루스 커밍스 지음ㆍ김범 옮김ㆍ글항아리 발행ㆍ1권 704쪽(4만 원) 2-1권 624쪽(3만5,000원) 2-2권 656쪽(3만5,000원)

1권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에서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적했다. 그에게 1950년 6월 25일 남북 가운데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1949년부터 남북 간에 중소 규모의 유격전과 국지전이 이어지며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근본 원인이다.

커밍스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제 부역세력’과 ‘항일세력’이 있었다. 해방 후 남쪽에 들어선 미 군정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일본이 만든 총독부와 경찰제도, 여기에 부역한 한국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통일 대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면 북한에서는 만주에서 격렬한 유격 투쟁을 벌인 항일세력이 핵심 지도부를 장악하고 친일 세력을 청산한다. 커밍스는 이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내전’ 성격을 파악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지속된 대립이 미ㆍ소가 성급하게 그은 38도선에서 불붙었고, 미ㆍ중ㆍ소가 참여하는 거대한 전쟁으로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커밍스는 이승만 정부가 북진을 원했다고 본다. 일부 좌파세력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 유도설’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그가 ‘남침 유도설’을 단언한 바는 없다.

1,000쪽에 달하는 2권 ‘폭포의 굉음’은 두 권으로 나눠 번역됐다. 한반도 내부 상황에 집중한 1권과 달리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등 주변국의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책에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한국인에게 총력전이었다면, 미국인에게 자국 패권을 구축하고 재편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미국 보수 진영이 한국전쟁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며 세계 패권 추구에 필요한 국방비 증액, 분열된 국론 통일, 광범위한 해외 군사기지 구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미 국무부에 있던 딘 애치슨은 1954년 한 학술대회에서 말한다.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

더글라스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과 이승만(가운데) 대통령은 가까운 사이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다시 위협이 될수 없도록 북진하자고 주장하다 해임됐고 이승만 역시 북진 통일을 고집하며 정전협정에 반대하다 미국으로부터 강한 경고를 받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더글라스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과 이승만(가운데) 대통령은 가까운 사이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다시 위협이 될수 없도록 북진하자고 주장하다 해임됐고 이승만 역시 북진 통일을 고집하며 정전협정에 반대하다 미국으로부터 강한 경고를 받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전쟁의 시작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커밍스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누가 범인인지를 규정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게 전쟁 당사자인 우리의 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 사회의 내적 모순에서 찾고자 한 점을 두고 평가가 분분하다.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고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이 김일성 계획-스탈린 승인-마오쩌둥 협의에 의한 북한의 선제적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범인’이 분명해진 것이다.

커밍스가 실체에 충분하게 접근하지 못한 채, 역사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다만 커밍스는 지금까지도 ‘한국전은 내전이다,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는 생각을 지키고 있다. 복잡한 역사를 단순화하지 않겠다는 소신으로 보인다. 미국이 한국에서 한 행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승만 정권의 내심을 폭넓게 분석한 커밍스의 시각이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만큼은 분명하다. 커밍스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미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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