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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는 끝” 망치로 부쉈던 그 사람, 26년 지나 LP공장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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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사서, 음반 배급, 버스 운전, 파티 기획… 결국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게 답”
‘LP(Long Play record)는 갔구나.’
26년 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 LP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클래식 전문 음반사 성음(폴리그램)에 다닐 때다. LP(바이닐)판들이 3.5톤 트럭 가득 실려왔다. 전국 각지의 도매상들이 재고를 올려 보낸 거였다. 직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LP판을 뜯어 망치로 때려부수고 포대자루에 넣었다. 1997년, LP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CD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LP의 시대가 가기는, 간 것처럼 보였을 뿐. 미국레코드산업협회(RIAA)가 발간한 2022년 음악산업 수익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LP 판매량(4,100만 장)은 CD(3,300만 장)를 앞질렀다. 방탄소년단(BTS)의 진, 블랙핑크의 지수, 로제 같은 글로벌 스타들도 새 음원을 내면서 LP를 발매했다.
제 손으로 LP판 폐기에 나섰던 그는 뒤늦게 깨쳤다. ‘LP는 사라진 적도, 사라질 수도 없다’고. 2012년 다시 LP판 제작에 나선 이유다. 2016년부터는 아예 LP로만 음반을 낸다. 이젠 직접 LP공장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26년 동안 ‘음반장이’로, 그중 10년은 LP에 미쳐 산 최성철(54) 아트버스터 대표를 만났다. 그는 올해 1월 LP 전문 ‘제작소화수분’을 만들었다. 그는 제작소화수분의 COO(최고운영책임자)다. 제작소화수분이 가동을 시작하면 국내에도 최신 설비를 갖춘 LP 공장이 생기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간 한국에 LP 공장은 한 곳뿐이었다.
그에게 LP는 단순히 음악을 담는 도구가 아니다. 추억과 향기, 질감, 감성이 어우러진 예술의 총체다. 음악을 듣기 시작한 때부터 LP가 없었던 순간이 없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것. LP는 그의 삶이자 직업이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LP가 떠올랐고, 덕분에 그는 행복을 ‘Long Play’하고 있다.
그는 사서였다. 도서관학과 출신이 당시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라는 의학전문도서관이 일터였다. 안정적이었지만 재미는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음반사로 연이 닿아 직장을 옮겼다. 운명인 걸까. 새 일터는 클래식 전문 성음(폴리그램)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회사 건물 지하로 직원들이 호출됐다. 전국에서 올라온 LP판 재고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일일이 판을 부수고 깨서 포대자루에 넣었다. 전통적인 베스트셀러부터 신보까지 음반은 이미 CD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음반가게 매대도 CD 차지였다. ‘LP가 이렇게 버려질 수도 있다니.’ 제 손으로 음반을 부수면서도 충격을 받았다.
그의 업무는 신보 담당. 본사의 신보 정보를 받아 어떤 음반을 얼마나 배급할지를 결정하는 자리다. 도이치 그라모폰, 데카, 필립스, 아르히브… 폴리그램의 레이블도 다 꿰게 됐다. 적성에 맞았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2년 뒤엔 EMI로 이직해 승승장구했다. 음반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 그가 음반회사 재직 시절 얻은 재산이다.
2000년대 초반엔 음반기획사를 공동으로 창업했다. 그 시절 유행한 ‘컴필레이션 앨범(편집음반)’도 그의 손을 거쳤다. 클래식 명반을 CD 10장에 담은 앨범 ‘순수’로 시작해 재즈, 대중가요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면 “내는 것마다 대박을 쳤다”. 음반기획 아이디어가 샘솟을 때였다. 회사를 등진 건 일이 아닌 사람 때문이었다. 공동 창업자와 의견 충돌도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아름다운 동행’이란 음반 레이블을 새로이 만들었다.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계속 음반을 냈어요. 돈이 되는 음반이면 다 했죠. 피자 브랜드 라디오 프로모션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난관이 그를 괴롭혔다. 또 사람이었다. “그 인간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일도 못 하겠더라고요. 모든 걸 그만두는 것밖에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가 택한 새로운 일은 마을버스 운전. 혹시 서울에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김포로 갔다. 새벽 4시 30분 첫차로 나가, 오후 10시 30분 막차로 복귀했다. 하루에 한 노선을 60번 돌았다.
“오후 5시쯤 되면 김포 아파트단지에 불이 탁탁 켜지기 시작하거든요. 그때 어김없이 눈물이 그렇게 나는 거예요. 할머니 승객이 손수건으로 닦아줄 정도로.”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이 감정이 뭐지, 이거 내 일 아니잖아. 그럼 뭘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죠.”
그는 이력서를 여기저기 내기 시작했다. 재취업한 회사는 DMB 방송업체. 이어 파티공연 기획, 페스티벌 기획… 2006년부터 3년여를 줄기차게 달렸다. 버스 운전을 하던 시절 그가 품은 질문의 답이 ‘음반’이라는 건 나중에 알아차렸다.
‘음반’으로 돌아온 건 2009년이다. 그의 귀결은 그 시절 이미 대세였던 디지털 음원이 아니라 피지컬 음반이었다. 마침 DMB 채널에서 일할 때 고 김광석의 미공개 공연 실황을 박학기 등 지인들의 인터뷰와 함께 편집해 방송한 적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대 강당에서 유학생을 모아놓고 한 공연이었다. 그 음원의 저작인접권을 그가 갖고 있었다. 관객 한 명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둔 음원이 그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는 인터파크와 함께 2012년 한정판으로 그 공연 실황을 담은 LP 세트를 만들었다. 이어 CD로 제작했던 영화 ‘만추’ OST도 LP로 다시 내놓았다. 본격적으로 LP 제작에 나선 것이다.
이미 온라인 스트리밍이 대세였던 시대. 20대 이하는 LP는커녕 CD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가 많다. 그들은 ‘지름 12인치(30㎝)에 분당 약 33번 회전하는 음원 저장 매체’라는 LP의 설명을 보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왜 다시 LP였나요.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온라인 스트리밍은 아니었죠. 내가 그 세대는 아니라서.”
-이미 시대가 바뀌었는데 다시 피지컬 음반 기획을 하기에 불안하지는 않았나요.
“그 즈음 외국에 ‘레코드 페어’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신보도 LP로 꾸준히 나오고 있고요. ‘외국은 LP가 살아있네’ 싶었죠. LP의 임팩트는 CD와 비교가 안 돼요. CD에는 질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LP는 그렇지 않죠. 한번 들으려면 비닐을 뜯고, 판을 꺼내고, 턴 테이블에 올리는 수고스러움을 기꺼이 감내해야 하죠. 그런 불편함조차 좋았어요. LP가 주는 감성이죠.”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나요.
“근거는 잘 모르겠는데 될 거 같았어요. 내가 제일 먼저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외국에선 LP가 사장된 적이 없으니까요. LP 제작공장도 꾸준히 돌아가고 있었죠.”
-한국은 상황이 달랐으니, 제작 여건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시 LP 제작공장이 있긴 했지만, 품질 관리가 제대로 안 됐죠. 어떤 앨범은 1만 장을 찍었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불량이라는 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외국 업체를 찾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영국에서 찍었는데, 슬픔은 여기서부터죠.”
잠깐, 그 ‘슬픔’을 얘기하기 전에 LP 제작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LP는 크게 아날로그 마스터링, 커팅(레커 혹은 DMM 방식), 스탬퍼 제작, 프레스, 후가공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아날로그 마스터링은 LP에 맞게 음원을 복원하는 과정, 커팅은 동판에 소릿골을 새기는 과정이다. 스탬퍼는 LP를 대량으로 찍을 수 있는 원판(금형)을 말한다. 프레스는 LP를 찍는 작업이다.
-슬픔이라니, 문제가 있었나요.
“1장 만드는 데 원가가 2만 원 정도 됐어요. 거기다 인쇄물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이 엄청 들더라고요. 그래도 3개월이면 된다고 하니 맡겼는데 점점 불량품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AS도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독일로 갔죠. 좀 느리고, 비용도 비쌌지만 영국보다는 낫더라고요.”
-돈은 좀 벌렸나요.
“하나 발주하면, 다음 달엔 또 새로운 걸 발주해야 제작비와 판매비가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였어요. 그러니까 계속 새 음반을 내야 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 삐끗하면 동생한테 돈 빌려서 막고요. 제작비 고민이 제일 컸어요.”
-힘들었겠네요.
“주위에서 저보고 미쳤다고들 했죠. 그래도 안 팔리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제작하는 것마다 바로 소진되니까 신나게 계속 할 수 있었죠.”
-그 시기 ‘실패’ 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뭔가요.
“아코디언의 대가 심성락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예요. 신예 반도네온 연주가 고상지씨와 컬래버 공연을 기획했죠. 그런데 공연을 불과 나흘 앞두고 심 선생님 댁에 불이 나서 30년 쓰신 아코디언이 타버린 거예요. 악기를 빌려서 공연은 마무리했는데, 선생님의 악기는 없어진 거잖아요. 쓰시던 악기가 이탈리아산 슈퍼 파올로 소프라니 5열식 아코디언이었는데 3,000만 원짜리였어요. 그걸 마련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크라우드 펀딩이란 걸 처음 해봤죠.”
펀딩은 대성공이었다. 삽시간에 목표 금액이 모였다. 일정 금액 이상을 낸 펀딩 참여자의 이름은 악기를 덮는 천에 모두 새겼다. 이 뜻깊은 새 악기로 감사 연주회를 하고 심 선생의 연주가 담긴 LP판도 만들어 펀딩 참여자들에게 리워드로 주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체코의 LP공장에 발주했는데, 제 날짜에 LP가 안 오는 거예요. 연락도 안 되고요. 공연날 LP판을 펀딩 참여자들에게 드려야 하는데 말이에요. 어쩔 수 없이 공연을 치른 뒤에 ‘이러저러해서 LP판 제작이 늦어졌다. 죄송하다’고 설명했어요. 한마디라도 불만을 표하는 분이 없는 거예요. ‘공연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LP는 되는 대로 보내면 된다’면서.”
-대단하네요.
“이 사람들을 절대 실망시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6개월 만에 LP가 제대로 왔고, 제가 일일이 다 포장을 해서 택배로 보내드렸죠. LP의 속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가 아예 LP 제작사를 만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올해 1월 동생 최돈철(제작소화수분 CEO)씨와 함께 제작소화수분을 차렸다. 제작소화수분에 놓을 최신 프레스 기계를 구입하려 ‘크라우디’에서 투자형 펀딩도 시작했다. 일종의 주주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직접 LP를 제작해보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됐겠네요.
“제작소화수분에는 체코산 더블 프레스 기계가 들어올 거예요. 프레스가 1개가 아닌 2개가 동시에 돌아가니까 생산량이 2배가 되는 거죠. 리드타임(생산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돼요. 독보적인 마스터링 기술도 있고요. 매체 특성에 맞게 음원을 아날로그 마스터링하는 프리즘 사운드 기술을 적용할 거예요. 그 기술의 전문가가 제작소화수분에 합류한 백성호 이사예요.”
-2012년부터 낸 LP 앨범이 얼마나 되나요.
“100여 타이틀쯤 될 거예요.”
-업계에서 재고율이 3% 안 되는 음반 기획으로 유명하다고 들었어요.
“제가 속으로 그래요. ‘나보다 음반에 대해 잘 아는 놈은 별로 없을걸.’ 그게 제가 성음(폴리그램)이나 EMI에 근무할 때 트레이닝 받은 능력이니까요. 돌고 돌아서, 내가 잘 알고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LP 제작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간 낸 LP 음반들 ‘그 사람 노무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8월14일)을 기념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뜻을 담은 ‘이야기해주세요’, 일반인들이 참여한 김광석 트리뷰트 프로젝트 ‘안녕, 광석이형’ 등을 보면 음악뿐 아니라 의미를 담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알아주는 분들을 만날 때 제일 신나요.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이야기해주세요’는 여성 뮤지션들이 뜻을 모은 앨범이죠. 이 앨범을 내고 정말 큰 응원을 받았어요. 한때는 앨범에 향기를 담은 적도 있어요.”
-향기요?
“네. 익숙한 음악이 소환하는 기억을 향기로 구체화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음반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어서 라벨에 뿌리고 찍거나, 설명지에 뿌려 담기도 했죠. ‘반향 프로젝트’라고 이름도 붙여서요. 그런데 냄새가 오래가진 않더라고요.”
-실패한 건가요?
“시도는 했으나 아직 반향은 안 왔다고 생각해요. 하하.”
-세상이 ‘내가 담으려는 LP정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는 없었나요.
“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뒤쪽의 LP장으로 가더니 앨범 하나를 들고 왔다. ‘누구인지 모를 당신이 곁이 되는 순간’이라고 제목을 붙인 앨범이었다. 음악감독 최경식의 드라마 ‘푸른안개’ 삽입곡, 영화 ‘친구' 삽입곡, 영화 '행복' 메인 테마를 포함해 9곡이 들어 있다.
“2020년에 낸 앨범이에요. ‘내가 내는 마지막 LP다’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죠. 디자인이나 글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곡도 판매량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해서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제작비 때문에 터덕터덕 앨범을 내던 때예요. 투자자를 찾는다는 플라스틱 홍보 부채까지 만들어서 앨범에 넣기도 했었죠. ‘20여 년간 꾸준히 일을 하고도 왜 아직도 이러고 있나’ 깊은 회의가 들었어요. 이미 동생이 장남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나까지 힘들 때마다 동생한테 손을 벌렸죠. ‘더 이상 못해먹겠다’ 싶었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어요. 아침에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는. 엄청 피폐했죠. 앨범 설명 글에도 그게 묻어났나 봐요.”
그 글의 일부는 이렇다.
“상처를 보듬어 주고 생의 허기를 달래어 주었던 음악들,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순간들, 그 긴 여운들을 언젠가는 담아내고 싶었다. (…) 찬란한 음악들을 담아내고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설명할 수 없는 생의 절박함과 바닥 없는 슬픔을 응시했던 깊고 저린 9곡의 음악들..”
-그 앨범을 내고 어떻게 됐나요. 마지막 앨범은 아니잖아요.
“기대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죠. 제가 내는 앨범을 꾸준히 사던 분이 제게 연락을 한 거예요. ‘당신이 낸 앨범 거의 다 산 사람이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요. 그 분이 제1호 투자자가 됐어요.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였죠. 이후 낸 앨범들도 다 잘됐고요. 제겐 각별한 분이에요.”
앨범 제목(‘누구인지 모를 당신이 곁이 되는 순간’)처럼 된 거다.
-심적으로도 달라진 게 있나요.
“참 후련했어요. 자기 확신도 생겼죠. ‘내가 이 일을 하긴 해야 하나 보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는.”
그리고 다시 LP의 시대가 왔다. LP판에서 향수를 느끼는 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도 LP를 찾는다. 예스24가 지난해 LP 구매층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30대가 전체의 36.3%를 차지했다.
-LP가 주목받는데 어떤가요.
“예전에 LP를 다시 낸다니까 업계에서조차 ‘LP를요?’ 하고 되묻더군요. 그때 속으로 ‘그래, 너는 계속 CD나 찍거라’ 그랬거든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아서 반갑죠.”
-실패라는 단어를 최성철만의 언어로 새롭게 정의한다면 뭘까요.
“삼켜야 하는 것. 몇 번이든 삼켜야 버틸 수 있는 거 아녜요?”
-삼켰더니 어땠나요.
“어떨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또 어떤 때는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힘을 낸 적도 있죠. 제게 신앙이 있는데, 그게 동생(최돈철 대표)이에요. 몇 번의 실패를 하면서 상의할 사람은 동생밖에 없었죠. 이제는 저와 제작소화수분을 하겠다고 안정적인 직장도 버리고 합류했고요. 실패를 삼키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동생 덕분이죠.”
-실패의 경험들이 준 ‘삶의 도’가 있나요.
“‘뭐, 깨지면 깨지는 거지.’ 앞으로 또 깨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이제 무섭지 않아요. 혼자도 아닌데요.”
이 빠르고 바쁜 시대에 공들여 긴 시간 만드는 ‘롱 플레이 레코드’가 다시 주목받는 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쉴 틈’ 하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회사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돈에 치여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고이 꺼내 닦아 턴 테이블에 올려놓는 행위 자체가 위안이니까.
그는 “제작소화수분이 음반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26년 전엔 ‘LP의 시대는 끝났나 보다’면서 남들 따라 망치로 판을 부쉈지만, LP는 살아남았고 그는 거기에 앞날을 걸었다. “LP는 오래된 미래”라는 그의 정의가, 이래저래 썩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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