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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위기? 관록의 기민련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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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한국 사회에서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는 꽤 부정적으로 쓰인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좀 굴러본’ 정치인이라면 관록이 있다기보다 ‘뒤가 구릴 듯한’ ‘과욕을 부리는’이라는 뜻으로 수렴된다. 독일 현대사를 공부한 문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책 ‘독일현대정치사’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정치가 초보일수록 높이 평가받는 직무일 뿐이라면, 우리 모두의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정치의 본질적 특성인 복합성, 다양성, 모호성에 개인의 타고난 지력이나 직관으로 맞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정치 역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역사성과 축적된 경험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책은 독일을 이끈 보수정당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을 낱낱이 해부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른 ‘사회적 시장경제’를 뿌리내리고 동ㆍ서독 통일의 대업을 넘어 유럽의 맹주로 우뚝 서기까지, 관록의 정당 기민련의 성취와 한계를 균형 있게 서술했다.
현대 독일정치사는 ‘기민련의 역사’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기민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에서 치러진 20번의 연방의회 선거에서 16번 승리했다. 전후 독일 총리 9명 가운데 6명이 기민련 출신이다. 한번 정권을 잡으면 잘 놓지 않았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14년, 헬무트 콜 총리 16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 16년, 루드비히 에어하르트와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 도합 6년 등 장기 집권했다.
‘능력이 검증되면 믿고 맡긴다’는 게 기민련 방식이다.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에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 도입, 쿠어트 비덴코프의 공동결정권 도입 메르켈의 난민 수용 등은 느리지만 일관된 정책의 결과다. 깜짝 스타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잘 없는 이유도 이런 기민련 DNA에 기인한다. 물론 단점도 있다. 독일은 코로나 시기 ‘결정이 느리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느림을 허용하는 건 협상과 타협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연정이 필수인 독일 정치구조에서 협상력은 기민련 정치인의 덕목일 수밖에 없었다. ‘걸어 다니는 중재위원회’ 키징어, ‘협상가’ 콜, ‘탁월한 청중’ 메르켈 등 기민련 거물들은 당대 협상 전문가였다. “고유한 노선을 가진 정치가를 찾기 어렵게 하는 정치권력의 현실 속에서, 타협에 타협을 거듭하며 느리고 일관되게 움직이는 기민련 정치가들의 행보야말로 독일 정치의 특징이다.”
한국 보수에 시사점이 많을 책이다. 나치 광풍의 처참한 결과를 목격한 기민련은 극단적 마르크스주의나 자유방임식 자본주의를 모두 배격했다. 대신 제3의 길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했다. 경제 성장과 사회 연대를 모두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달성했다. 안보를 중요시하면서도 동독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통일을 이뤄냈다. 대립과 반목을 피하고 타협과 중도를 견지해 역사에 남을 성취를 달성했다.
가부장적인 기민당의 리더십, 총리에 종속적인 당 문화, 정치자금 스캔들 등 문제점도 충실하게 서술했다. 저자는 “많은 나라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결국 이 만한 정치도 드물었다”고 결론짓는다. 답답한 한국 정치에 지친 이들에게 정당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선한 공기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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