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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확실한 동아줄인가" 미국·중국 등쌀에 동남아는 각자도생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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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 속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외교전략 전문가 키쇼어 마부바니 싱가포르국립대 아시아연구소 석좌교수는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 비즈니스 리더 정상회의’에서 남중국해 갈등에 따른 아세안 분열을 지역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이렇게 꼬집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비동맹 기조를 고수하며 정치·안보·경제 이슈에서 단일대오를 이루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강대국 패권 경쟁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이면서 어떤 동아줄을 잡을지 고민해야 하는 선택에 내몰렸다는 게 마부바니 교수의 진단이다.
인도양과 태평양 교차로에 위치하는 동남아 10개국 지역협력체 아세안은 미중 갈등 속에서 침묵하며 실리를 챙겨 왔다.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피하고 자율성과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생존 방식이었다.
수십 년간 지속된 이 전략은 아세안의 몸값을 적잖이 띄웠다. 패권 국가로 발돋움한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주변국 선박이나 항공기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벌이고, 동남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려는 미국이 맞불을 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평화롭던 각국 앞바다는 작은 불씨로도 순식간에 폭발할 수 있는 위태로운 화약고가 됐다.
아세안의 전략적 모호성은 힘을 잃어 갔다. 어정쩡한 중도를 표방하다가는 안보도 경제도 챙기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필리핀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취임 100일도 안 된 지난해 9월 “미국 없는 필리핀 미래는 상상할 수도 없다”며 미국 손을 잡았다. 올해 행보도 친미 일색이다. 미국 동맹인 호주, 일본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고, 주요 군사기지 4곳을 미군이 추가로 사용하게 내줬다.
2014년 체결한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따라 미군이 필리핀 기지 5곳을 사용했는데 9곳으로 늘린 것이다. 추가된 기지 4곳 중 3곳은 대만과 가깝고, 한 곳은 중국이 군사기지화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의 인공 섬과 가깝다.
이달 11일부터 28일까지 필리핀군과 미군은 필리핀 전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합동 군사훈련 ‘발리카탄’을 실시하고 있다. 다음 달 1일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워싱턴을 찾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한다. 모든 행보의 의미는 하나로 귀결된다. 남중국해 내해화(內海化)를 시도하는 중국의 군사화 억제다.
필리핀의 변심에 중국은 비상이 걸렸다. 친강 중국 외교부장은 22일 마닐라를 찾아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필리핀은 역사의 대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다급함을 보여준 사례였다.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고민도 깊다. 미중 사이 외교 균형을 맞추려 하지만, 코앞에서 힘을 휘두르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3일 사설에서 “역외 세력(미국)에 영합하는 것은 긴장과 위험을 불러일으키고 역효과를 낸다는 점을 (아세안) 국가에 다시 한번 상기한다”고 압박했다.
올 초 싱가포르 ISEAS-유소프 이샥 연구소가 발표한 ‘동남아 현황 보고서’는 아세안의 고민을 보여준다. 아세안 회원국 오피니언 리더 1,3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국과 중국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61.1%가 미국을 꼽았다. 중국은 38.9%였다. ‘동남아에서 정치적, 전략적 영향이 가장 큰 국가나 기구’를 묻는 질문에선 중국이 41.5%로 1위를 차지했다. ‘차이나 머니’를 비롯한 중국의 실질적 위력을 무시하기 어렵단 의미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중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싱가포르는 이달 말부터 5월 초까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합동 해상군사훈련을 한다. 2021년 이후 2년 만이다. 미국이 필리핀을 앞세워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자 중국 역시 미국과 가까웠던 싱가포르를 포섭해 맞불을 놓은 셈이다. 중국 해군은 미사일 호위함 위린함과 소해함 츠비함을 파견할 계획이다.
말레이시아 역시 중국과 점점 더 깊은 국방·외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호주 싱크탱크 로위연구소는 “지난 5년간 말레이시아는 중국산 무기를 사거나 중국과의 군사 대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달 초에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가 동시에 중국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국가주석직 3연임을 확정한 이후 중국을 찾은 첫 외국 정상이다. 시 주석은 “아시아 국가들이 ‘집단 괴롭힘’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며 미국에 동조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을 쏟아냈다. 중국이 두 국가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데다 화교가 인구의 각각 77%(싱가포르)와 25%(말레이시아)를 차지하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에 손을 내민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략적 모호성'을 지키는 나라도 있다. 남중국해를 두고 중국과 가장 첨예하게 맞붙은 베트남이다. 중국과 정치 노선을 같이하면서도 미국의 적극적인 구애는 거부하지 않는다. 미국이 내민 손을 시원하게 잡지도 않았다.
"베트남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남중국해 판세가 갈릴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만, 정부가 철저한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친미 또는 친중으로 쏠리지 않을 거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아세안의 각자도생 시동에 우려의 목소리도 커진다. 살아남으려면 10개국이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이합집산을 하다가는 존재감이 희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세안 지역 연구가 칼라일 테일러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명예교수는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이러다가는 아세안이 강대국에 분할되거나 정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스도 “미국이냐 중국이냐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세안의 역할과 설립 취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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