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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못 피한 '악마의 시' 악몽... 40대 교수의 죽음이 가리키는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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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대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인문사회학관 A동 7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남성의 주검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날카로운 흉기에 가슴과 배, 목, 얼굴 등이 적어도 예닐곱 번은 찔린 듯했다.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말해 주듯 사방에 붉은 피가 낭자했다. 사망 추정 시간은 1991년 7월 11일 밤 10시 이후. 이곳에서 비교문화학을 강의하던 조교수 이가라시 히토시(44)의 마지막이었다.
'''악마의 시' 번역자 피살." 이튿날 일본 조간신문과 외신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는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1988년 9월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이가라시 교수는 살해되기 1년 반 전, 이 소설의 '일본어 번역판'을 냈다. 범인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논란의 중심에 선 '악마의 시'가 그의 끔찍한 죽음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가라시 교수는 일본 내 이슬람 문화 연구의 권위자였다. 도쿄대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선 이슬람 미술을 선택했고, 1979년까지 이란 왕립 아카데미 연구원도 지냈다. 쓰쿠바대에선 비교문화학을 가르쳤다. 연극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탓에 학교에선 인기 교수로 통했다. 그의 강의엔 늘 수백 명의 수강생이 몰렸다. 학교 울타리를 넘어, 세상의 주목을 끈 건 1990년 2월 '악마의 시' 일본어 번역판을 출간했을 때다.
그만큼 '악마의 시'는 전 세계에서 논쟁적인 작품이었다. 영국 런던에서 인도 뭄바이발 여객기 테러 사고를 겪은 두 인도인이 각자 천사와 악마의 영향을 받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으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환상을 뒤섞어 이슬람교의 기원과 이민자의 삶 등을 그렸다.
그러나 1988년 출간 직후 신성 모독 논란에 휩싸이며 이슬람 진영의 표적이 됐다. 이슬람교 예언자이자 무슬림(이슬람 신자)의 표본인 '무함마드'와 이슬람 경전 '쿠란'을 불경하게 묘사하고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이슬람권 국가에서 잇따라 '금서'로 지정됐고, 출간 이듬해엔 당시 이란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종교재판 '파트와'를 통해 루슈디와 책 출판 관련자들에게 사형 선고까지 내렸다. 이후 루슈디는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이가라시 교수도 번역본 출간 직후, 일본 내 무슬림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출판사 주변에선 반발 시위가 잇따랐다. 도쿄에서 열린 출판 기념 기자회견 도중, 한 파키스탄 무슬림이 출판사 대표 지아니 파르마를 공격하기 위해 무대로 뛰어 올라가다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이가라시 교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 책이 이슬람을 모독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이슬람을 경시하는 것"이라며 "문학 작품으로 봐 달라"고 호소했다.
일본어판 '악마의 시'가 나온 지 1년 5개월이 지난 1991년 7월 11일. 여느 때처럼 강의를 마친 뒤 연구실을 나선 이가라시 교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시신 옆에 있던 갈색 서류 가방에는 그가 흉기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티끌만 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주변엔 폐쇄회로(CC)TV도, 경비원도 없었다. 물증은커녕 목격자도 전혀 없는 피살 사건인 셈이다.
다만 40대 젊은 교수의 허무한 죽음이 '악마의 시'와 무관치 않다는 정황만은 분명했다. 실제로 번역판 출간 직후 이가라시 교수는 이슬람 과격단체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경찰의 신변보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피살 소식을 접한 파르마 대표는 "무슬림의 소행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아마 이가라시 교수가 나보다 더 쉬운 표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작자 루슈디도 이가라시 교수 살해 사실이 알려진 직후 "극도로 괴롭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 경찰은 개인적 원한 등 모든 가능성을 열고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경찰은 "'악마의 시' 번역과 피습 사이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수사 결과를 내놨다. 용의자와 관련한 의혹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 매체 데일리신초에 따르면, 당시 수사당국은 쓰쿠바대에서 유학 중이던 방글라데시 국적 학생 A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이가라시 교수가 숨진 다음 날, A가 방글라데시행 비행기에 탑승한 출입국 기록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A의 신병은 확보되지 않았다. 출입국 기록 외에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었던 탓이다. 당시 일본 매체들은 수사당국이 일본과 이슬람 국가 간 외교 관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정부 고위층 압력에 물러섰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뿐이었다.
세월만 속절없이 흘렀다. 2006년 7월 11일, 이른바 '이가라시 교수 피습 사건'은 발생 15년 만에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그의 아내이자 일본 비교문학자 이가라시 마사코는 경찰을 향해 "남편이 살해된 사건 수사를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결국 2009년 경찰서를 찾아 이가라시 교수가 남긴 지갑과 안경 등 유류품을 수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그렇게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악마의 시'가 부른 악몽은 이가라시 교수에서 멈추지 않았다. 살해된 건 이가라시 교수가 유일했지만, 각국에서 이 작품과 관련된 인물들이 잇따라 피습을 당했다. 이가라시 교수 피살 일주일 전인 1990년 7월 3일에도 이탈리아어판 '악마의 시'를 펴낸 번역가 에토레 카프리올로가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괴한의 흉기에 수차례 찔리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그는 목숨을 건졌다.
1993년 7월엔 '악마의 시' 발췌문을 번역해 현지 신문에 게재했던 튀르키예 소설가 아지즈 네신을 노린 호텔 방화 사건도 일어났다. 당시 78세였던 네신은 사다리를 타고 간신히 탈출했으나, 같은 호텔 투숙객 37명이 화재로 숨졌다. 같은 해 10월 노르웨이판 '악마의 시' 출판가인 윌리엄 니가드가 오슬로 자택 인근에서 세 차례 총에 맞고 중상을 입은 일도 있었다. '불온서적'을 지옥으로 보내려는 이 '불온한' 저격은 이처럼 국경을 넘나들었다.
결국엔 원작자 루슈디도 타깃이 됐다. 지난해 8월 루슈디는 미국 뉴욕 강연장에서 레바논계 미국인이자 무슬림 청년 하디 마타르가 휘두른 흉기에 얼굴과 목, 배 등을 15차례나 찔렸다. 오른쪽 눈이 실명됐고, 얼굴엔 큰 흉터가 남았다. 왼팔 신경도 망가졌다. 루슈디의 나이 75세, '악마의 시'가 세상에 나온 지 무려 34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 마타르는 "악마의 시를 2쪽 정도 읽었다"며 "루슈디는 이슬람을 공격한 사람"이라고 했다. 루슈디는 올해 초 피습 후 첫 인터뷰에서 "여전히 악몽에 시달린다"고 토로했다.
세월에 묻힌 이가라시 교수 피살을 포함해 30여 년간 '악마의 시' 주변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폭력은 펜까지 꺾지는 못했다. 문학은 살아남았다. 루슈디 피습 이후 '악마의 시'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현대문학 분야 1위에 오르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뉴욕에선 루슈디를 지지하고 표현의 자유 수호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살만 루슈디와 함께하자(Stand with Salman)'는 구호가 맨해튼 공립도서관 앞에 울려 퍼졌다.
이란계 미국인으로 워싱턴포스트 테헤란 지국장을 지낸 제이슨 레자이언 기자는 루슈디 피습 사건 이후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신앙과 종교가 어떻든, 루슈디에 대한 공격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자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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