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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도 차마 치울 수 없었던 '돌덩이'

입력
2023.04.1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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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협정으로 징용문제 해결" 주장에도
피해자 개인 청구권 효력은 일관되게 인정
한 총리 발언, 피해자 쟁취 권리 외면 아닌지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 분야에 관한 대정부질문에서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독도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 분야에 관한 대정부질문에서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독도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고 되뇌지만 피해자(국)와 가해자(국), 국내법과 국제법 등 다차원의 권리와 의무가 얽힌 문제가 그렇게 일도양단 정리되긴 어렵고, 실제 일본의 입장 정립 과정도 매끄럽거나 일관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 일본의 한국인 강제징용 배상에 관한 입장은 2007년 자국 최고재판소 판결에 기반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인 피해자가 배상을 청구하더라도 일본은 이에 응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 개인에게 청구권이 있긴 하지만 재판을 통해 이를 행사할 권리, 즉 소권(訴權)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했다는 논리다.

이를 뒤집어보면 청구권협정의 '청구권 포기' 조항에도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을 일본이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국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몰인정한 태도 때문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일본 정부는 패전 이후 맞닥뜨린 각종 송사에서 '개인 청구권은 국가 간 조약에도 소멸될 수 없는 권리'라는 입장을 대체로 견지해왔다. 협정상 청구권 포기는 국가가 자국민 피해를 구제해 달라고 가해국에 청구하는 '외교보호권'에만 적용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 존엄성은 어떤 국제규범보다 앞서는 '강행규정'이고 개인은 국제법의 주체로서 국가를 상대로 청구권을 갖는다는 법리는 국제사회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일본의 이런 입장은 1960년대 '원폭 재판'에서부터 확인된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이 패전국 일본과 연합국 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으로 미국에 손해배상 청구가 어려워지자 자국에 보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피고석에 선 일본 정부는 "개인이 본국 정부를 통하지 않고 독립해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직접 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국가의 권리와 다르다"고 변론했다. 2차 대전 중 구소련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일본인 피해자들이 일소공동선언(1956)에 배상이 가로막히자 본국에서 제기한 소송에서도 일본 정부는 같은 논리를 폈다. 피해 구제 책임을 회피하며 가해국에 가서 직접 소송하라고 국민들 등을 떠밀면서도 법리적으론 일관된 입장을 취했던 셈이다.

이랬던 일본이 가해국으로서 외국인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받자 태도를 바꿨다.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있었던 재판이 계기였다고 한다.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가해기업에 배상을 청구한 이 소송에서 주 법원이 관할을 인정하자, 일본 정부는 의견서를 내고 전후 조약에 의해 피해자의 재판받을 권리(소권)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자국민에겐 "가해국의 국내 절차에 따라 청구할 길이 남아 있다"고 해놓고 외국인에겐 "조약상 일본 국내 절차로 청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뻗댄 셈이다. 일본 내 한국 징용 피해자 소송을 지원했던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한 입으로 두 말 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다만 일본은 자국에 유리하게 입장을 바꾸는 와중에도 개인 청구권만큼은 그대로 인정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징용 피해자들이 긴 세월 부단하게 법정 투쟁을 펼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당초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했다고 단정했던 한국 정부 또한 김영삼·김대중 정부 들어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무현 정부는 '반인도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고 공식화했다. 2012, 2018년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은, 논란은 논란대로, 개인 권리 행사 확대의 도도한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무총리, 그것도 우리나라 총리가 '가장 큰 돌덩이' 운운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이훈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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