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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의 심장 가졌던 헨더슨, 성공과 실패의 기록

입력
2023.04.07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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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지음ㆍ한울 발행ㆍ488쪽ㆍ5만 원

김정기 지음ㆍ한울 발행ㆍ488쪽ㆍ5만 원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평전’은 흥미로운 텍스트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몰랐지만 중요한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는 1948~1963년 한국에서 미국대사관 국회연락관ㆍ문정관ㆍ대사특별정치보좌관을 지낸 외교관이다. 한반도 정책을 좌우한 미국 정부 '내부인'이다. 더구나 이승만 독재, 한국전쟁, 박정희 쿠데타 등 굵직한 현대사를 겪었다. 미국이 어떤 의도와 방식으로 한국 정치에 개입했는지, 생생한 증언이 담긴 책이 이 평전이다.

헨더슨은 불법적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이었다. '독재정권이라도 친미(親美)면 된다'고 생각한 미 대사관과 결이 달랐다. 한미 양국이 모두 부담스러워한 헨더슨은 1963년 리영희 당시 합동통신사 기자와의 만남이 문제 돼 본국으로 돌려보내진다. 그 영욕의 일대기를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꼼꼼한 자료 조사와 취재를 통해 재구성했다. 한국학 연구 개척자로서의 면모, 군사정권을 비판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의 행적도 조망했다.

우선 헨더슨이 남긴 ‘국회 프락치사건’ 기록 얘기부터. 이승만 정권은 1949년 5월 제헌국회 의원 15명에게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체포한다. 이들이 정부 운영에 방해되자 잔혹하게 고문해 정치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헨더슨은 이 사건을 ‘국회 테러’라고 판단, 모든 재판을 방청해 기록으로 남긴다. 이승만 정권의 제헌국회 탄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가 헨더슨 기록이다.

1961년 서울 혜화동 성 베네딕트 성당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그레고리 헨더슨 부부. 한울 제공

1961년 서울 혜화동 성 베네딕트 성당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그레고리 헨더슨 부부. 한울 제공

헨더슨은 군사정권이 민주주의에 역행할 뿐 아니라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17~19세기 조선은 유럽보다 더 문민화된 정치체제를 가졌다. 이 문민정체(政體)가 일본 군부정체에 의해 중단됐다. 그런데 왜 해방 후 한국이 군사체제로 되돌아가는가. 일본은 군사체제를 극복하고 문민체제로 들어섰는데.” 그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박정희 정권도 규탄했다. 군사정권을 묵인한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헨더슨은 1963년 본국으로 돌아간 후 외교관직을 사임했다.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터프트대 교수로 한국을 연구한다. 유신독재에 침묵하지 않는다. 1973년 미 하원이 주도한 ‘한국인권청문회’에 참석해 박정희 정권의 반인륜적 고문을 고발하고, 전두환의 5ㆍ18민주화운동 개입을 폭로한다. 헨더슨은 박정희 정권 때 ‘한국 도자기를 밀반출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청문회를 앞두고 궁지에 몰린 박 정권이 헨더슨의 입을 막아보려고 한 흑색선전”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저자의 헨더슨을 향한 시선이 매우 우호적이어서 균형 있는 서술이 다소 아쉽다. 다만 헨더슨의 유별난 한국 사랑은 특출 난 면이 있다. 헨더슨은 한국 정치를 다룬 책 ‘소용돌이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를 썼는데 미국 학자와 외교관들 사이에선 한국을 이해하는 독보적 저서로 평가된다. 다산 정약용, 유교, 한국 도자기를 주제로 논문과 글을 발표해 한국학 연구의 문을 열어젖히기도 했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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