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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탱'을 싫어했던 기요탱

입력
2023.03.2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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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기요탱의 장례식

만년의 기요탱은 자신의 성을 개명해 달라고 청원할 만큼 '기요탱'을 싫어했다. wikimedia.commons

만년의 기요탱은 자신의 성을 개명해 달라고 청원할 만큼 '기요탱'을 싫어했다. wikimedia.commons

18세기 프랑스 외과의 출신 제헌의회 의원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1738.5.28~1814.3.26)이 단두대 ‘기요탱(또는 기요틴)’으로 처형법을 통일하도록 적극 제안, 프랑스대혁명 직후 제헌의회가 전격 수용한 까닭은 혁명 이념 중 하나인 평등, 즉 신분제 철폐에 부합해서였다.
소수 귀족과 성직자는 면세 등 각종 특혜뿐 아니라 흉악 범죄로 사형을 당할 때에도 칼이나 도끼로 단숨에 죽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반면 농민 도시노동자 등 평민은 화형과 익살(물에 빠뜨려 죽임), 장살(때려 죽임), 능지처참이라고도 하는 거열형 등 상대적으로 느리고 고통스럽게 처형당했다. 사형제도 자체에 반대하던 기요탱에게 단두형은 이를테면 차선책이었고, 혁명정부는 1791년 단두형을 채택해 이듬해 한 노상강도에게 형을 처음 집행했다.

단두 기구는 중세 유럽 여러 나라에서 쓰였다. 미끄러지는 도끼를 장착한 중세 잉글랜드의 ‘핼리팩스 지빗(Halifax Gibbet)’, 스코틀랜드의 ‘스코티시 메이든(Maiden)’, 르네상스 시대의 ‘마나이아(mannaia)’······. 기요탱은 동료 의사 앙투안 루이와 독일 하프시코드 제작자 등의 도움으로 단두대를 효율적으로 개량했고, ‘기요탱의 단두대’는 혁명-반혁명의 피비린내 속에 점차 ‘기요탱’이란 이름으로 굳어졌다.

프랑스 생트의 한 산모가 거열형당하던 죄수의 비명소리에 산달도 되기 전 진통을 시작해 낳은 아이가 기요탱이라는 설화 같은 기록이 있다. 1788년 ‘파리 시민의 탄원’이란 팸플릿으로 사형제 폐지를 청원하기도 했던 기요탱은 단두대에 매인 자신의 성(姓)을 악몽처럼 여겼고, 차라리 개명해 달라는 청원까지 했다. 1814년 3월 26일, 파리 교외에서 기요탱의 장례식이 열렸다는 기록이 남은 걸 보면, 그 청원마저 거부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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