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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공짜, 일은 적게, 월급은 똑같이"...스페인 소도시의 사회주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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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역 세비야주에 속한 마리날레다. 후안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74) 시장이 44년째 재임 중인 작은 도시다. 면적은 24.8㎢이고, 인구는 2,600명 가량이다. 고르디요 시장은 1979년 이후 시장 선거에서 11번 연속 당선됐다. 스페인 역사상 처음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다.
고르디요 시장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부르고, 마리날레다를 '사회주의 유토피아'라고 칭한다. 스페인 정부가 채택한 자본주의 룰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사안'에서만큼은 사회주의를 최대한 구현하겠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구소련의 몰락 등을 거치며 사회주의는 실패한 모델이 됐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고르디요 시장에게 한결같은 지지를 보낸 건 왜일까. 한국일보는 이달 2, 3일(현지시간) 마리날레다를 찾아 이 독특한 소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펴봤다.
마리날레다가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유지해올 수 있었던 배경엔 스페인 현대사가 있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전 총통이 1975년 사망한 이후 스페인에서는 민주주의 요구가 들끓었다. 척박한 기후 탓에 스페인 북부에 비해 가난했던 안달루시아에서 터져 나온 저항의 목소리는 특히 컸다. 마리날레다 시민들은 극좌 성향의 정당(CUT)과 노동조합(SOC)을 조직했다. 이때 '시민과 노동자를 대표할 지도자'로 낙점 받은 사람이 고르디요 시장이다.
고르디요 시장은 과격한 운동가였다. 시장이 되자마자 정부와 자본가를 비판하는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엘 후무소 농장 몰수 운동'이 대표적이다. 그가 이끈 시위대는 "특정 귀족 가문이 소유한 12㎢ 크기 땅을 시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내놔야 한다"고 안달루시아 정부에 요구했다. 단식 투쟁도 했다. 12년 만인 1991년 시 정부는 땅을 무상으로 손에 넣었다. 시민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이 농장의 소유주가 됐다.
고르디요 시장과 시민들이 합의한 농장의 운영 원칙은 "노동자들, 특히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땅이 활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1970년대 후반 지역 실업률은 60%를 넘었다). 농장 건물 벽에는 여전히 '실업자들을 위한 땅'이라고 적혀 있다.
농장의 최우선 목표는 이윤 창출보다는 일자리 창출이었다. 재배 작물을 정할 때도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를 기준 삼았다. 인간의 노동력보다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해 생산하는 밀은 제외했다. 손이 많이 가는 올리브, 고추, 병아리콩,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이 선택됐다.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주 35시간 노동 지침도 만들었다.
실업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됐다. 농장 옆에 생긴 농작물 가공식품 공장에도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 세르기오 고메즈 레예스 시장 대행 겸 부시장은 한국일보와 만나 "고르디요 시장 취임 이후 마리날레다의 실업률은 줄곧 한 자릿수였다.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라고 소개했다(고르디요 시장은 지병으로 현재 시정을 잠시 떠나 있다).
농장과 공장 노동자들의 급여는 일한 시간만큼 공평하게 지급된다. 일한 시간만 따지므로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이 없다는 건 시의 자부심이다. 시는 홍보 책자에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직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같은 일에는 같은 임금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장에서 일하다 퇴직했다는 안토니오는 "수확철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다른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며 "협동조합 노동자 1인당 수입이 주변 지역보다 2배 이상 많을 때도 있었다"고 전했다. 고르디요 시장을 싫어한다면서 익명을 요구한 한 시민도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도시에 활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다만 이윤 창출을 추구하지 않는 협동조합이 신규 투자나 경영 혁신을 할 유인이 적은 탓에 총수입은 거의 매년 제자리걸음이다. 노동자 급여 수준도 높지 않다. 2016년 노동자 1인당 월 급여는 1,200유로(168만 원) 정도였는데, 현재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시는 '주거의 평등'도 실현 중이다. 세르기오 부시장은 "주거권은 시민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존엄한 삶을 위해 반드시 충족돼야 하는 권리라는 공감대가 확고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신은 '사회 주택 프로젝트'에 반영됐다. 세르기오 부시장에게 자세히 들어봤다.
"시가 소유한 시청 앞 공터를 공동주택 용지로 할당했다. 시는 건축 및 설계 전문가를 섭외하고 건축 자재를 구입했다. 집을 짓는 건 시민들에게 맡겼다. 집을 분양받으려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내가 살 집은 문자 그대로 내 손으로 짓는 것이다. 어느 집에 입주할지는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 건축 과정에서 자기 집에만 공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 등으로 집짓기에 참여할 수 없는 시민들을 위해선 시가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한다."
세르기오 부시장은 "사회주택에 대한 시민들의 만족도는 무척 높다"고 했다. 첫 프로젝트로 지은 집은 20채 정도였다. 반응이 뜨거웠다. 우선 임대료가 저렴하다. 월 임대료는 가족 구성원 수에 관계없이 15유로(약 2만 원)이다. 시청 주변이라 입지도 좋고, 한 채 크기가 200㎡ 정도라 대가족이 살아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집을 매매할 순 없지만 자녀 등 가족에게 양도하는 건 가능하다. 사실상 영구 임대인 셈이다. 현재 사회주택은 약 300채로, 마을 주민 3분의 1이 거주한다. 추가로 24채를 더 짓고 있다.
배우자, 자녀 2명과 함께 사회주택에 사는 안토니오는 "외벌이라 월급만으로는 집을 살 엄두를 못 냈는데, 사회주택 프로젝트 덕분에 평생 집 걱정 없이 살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보육 걱정도 별로 하지 않는다. 시청 옆 어린이집은 0~2세 아이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돌봐주는데, 월 이용료가 12유로(약 1만6,000원)다.
여가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야외 수영장은 마을의 자랑이다. 6유로(8,000원)만 내면 여름 내내 이용할 수 있는데, 인근 지역에 소문이 나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시는 영화 감상회 등 무료문화 행사도 자주 연다.
'평등하게 누리는 행복'에 대한 만족감이 도시에 가득 차 있었다. 평생을 마리날레다에서 살았다는 카르멘은 "고르디요 시장이 계속 재신임받는 건 시정 혜택을 시민들이 고루 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늘도 있다. 고르디요 시장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억압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도 없지 않았다. 마을에서 공장을 운영하다 쫓겨났다는 호세 안토니오 캐피탄은 "마을 경제 활동을 시가 장악하기 위해 정상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이들까지 몰아냈다"고 주장했다.
시의 경제가 협동조합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민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가 훼손된 측면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민은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도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고 했다.
고르디요 시장이 독재의 유혹에 빠지려 하는 징후도 있었다. 사회주택에 사는 한 여성은 "주택, 일자리 등의 배분 권한을 시가 갖고 있어서 시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수 없다"고 했다.
누적된 실망은 지난 선거에서 확인됐다. 2015년 시장 선거에서 득표율 72.54%를 얻었던 고르디요 시장의 득표율은 2019년 48.53%로 떨어졌다. 고르디요 시장은 차기 시장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사회주의 시정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세르기오 부시장은 "마리날레다의 사회주의는 평등과 연대를 중심 가치로 둔다. 효용 가치를 맹신하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인간적"이라고 했다. 이어 "사회주의가 지상과제는 아니지만, 마리날레다가 구현한 사회주의 모델 성공의 교훈을 한국에서도 되새겼으면 한다"고 전했다.
"11번의 시장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은 기본권을 공평하게 보장해 주는 정치와 그런 지도자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주거, 일자리, 보육 등은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 권리다. 고르디요 시장이 12선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하는 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이든 시간이 지나면 인기를 잃는다. 중요한 건 평등과 연대에 대한 유권자들의 열망을 기억하고 기본권과 관련해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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