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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로 가족 때리는 참전 군인들...우크라이나 여성 '이중 고통'

입력
2023.03.17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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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가정폭력 신고·상담전화 급증
가정폭력 생존 여성들, 집에서 또 다른 '전쟁'

지난 12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의 주민들이 포격을 맞아 무너진 집 앞에서 서로 위로하고 있다. 도네츠크=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12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의 주민들이 포격을 맞아 무너진 집 앞에서 서로 위로하고 있다. 도네츠크=로이터 연합뉴스

"전쟁은 내 남편을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 사는 옥사나(40)는 러시아군이 아닌 남편을 피해 보호시설에 머물고 있다. 16년간 부부로 지내면서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는 남편이 가정폭력범으로 돌변한 건 지난해 전쟁터에 다녀온 뒤부터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 직후 남편은 군에 징집됐다. 최전선인 동부 도네츠크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거기서 남편의 정신은 죽었다"고 옥사나는 말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옥사나를 종종 적군으로 착각했다. 잠든 아내의 목을 조르거나 흉기로 해치려고 했다.

우크라 가정폭력, 러시아 침공 이후 급증

참전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얻어 귀환하면서 가정폭력이 늘고 있다고 미국 타임지가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에겐 집이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된 셈이다.

타임에 따르면 지난해 1~4월 경찰에 신고된 가정폭력은 약 6만7,000건이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40% 늘어난 수치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기 위한 핫라인을 운영하는 단체 '라 스트라다'의 지난해 8월 상담 건수는 전년 동월 대비 50% 이상 급증한 5,000건에 육박했다.

가정 파괴나 2차 피해 등을 우려해 신고하지 못한 가정폭력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정폭력이 형사상 범죄로 공식 인정되지도 않는다.

'라 스트라다'의 카테리나 체레파카는 "수백만 명이 피란을 가면서 가정폭력이 보고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정폭력은 전쟁에 비해 심각하지 않다'는 태도 역시 신고가 줄어든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영웅'을 가정폭력범으로 고발하기도 쉽지 않다. 언제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게 더 쉽다.


지난달 23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인근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훈련하고 있다. 쿠피안스크=AP 뉴시스

지난달 23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인근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훈련하고 있다. 쿠피안스크=AP 뉴시스


참전 군인의 PTSD… "전쟁 이후 가정폭력 늘어"

전문가들은 "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가정폭력 문제는 더 악화할 것"으로 본다. 전쟁을 경험한 공동체에서 가정폭력 발생 비율이 더 높다는 건 이미 여러 연구로 입증됐다. 참전 군인들이 주로 앓는 PTSD 때문이다. PTSD는 대개 알코올 중독을 동반한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남성은 가정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6, 7배 높다(영국 옥스퍼드대학 시나 파젤 교수팀)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정폭력 생존자와 군인을 상담하는 심리학자 빌레나 키트는 "2014년 돈바스 분쟁 참전 군인들이 귀환한 후 가정폭력이 급증했듯 지금의 전쟁이 끝나면 또 한번의 물결이 일 것"이라며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우려했다.

전시 중인 우크라이나 정부의 대응 여력이 없는 것도 문제다. 전쟁 전 르비우에 1곳뿐이던 가정폭력 생존자 보호시설은 현재 7곳으로 늘었지만, 이마저도 가득 차 한계에 이르렀다. PTSD를 앓는 참전 군인들 역시 도움이나 치료를 받을 곳이 전무하다. 옥사나는 "남편을 위해 무슨 도움이든 받으려고 수소문했지만 '전쟁이 끝나면 지원하겠다'란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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