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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 항공모함을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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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제프리 파이크(Geoffrey Pyke, 1893.11.9~1948.2.21)는 무척 독창적인 방식으로 양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그는 케임브리지대 재학 시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전쟁 통신원으로 자원, 위조 여권으로 독일 베를린에 들어가 활동하다 6일 만에 간첩 혐의로 체포됐고, 수감 중 이듬해 7월 탈출해 네덜란드 국경을 도보로 넘어 영국으로 복귀했다. 그는 수감-탈출기를 연재해 달라는 신문사 제안을 거절했는데, 자신이 원한 건 전쟁 특파원이었지 포로(체험기)가 아니었다는 게 이유였다.
유대인이어서 청소년기 차별을 경험한 그는 전간기 주식 투자로 돈을 벌어 케임브리지의 집을 ‘몰팅 하우스(Malting House)’란 이름의 어린이학교로 개조해 운영했다. 교육학자 존 듀이의 철학대로 간섭-체벌 없는 자율 교육을 추구했다는 그의 학교는 꽤나 유명해져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될 정도였지만 재정난 끝에 27년 폐교됐다.
그는 ‘발명가’로 2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대형 폭탄 실린더 표면을 스크루 형태로 깎아 그걸 바퀴 삼아 눈 위를 달리는 설상차를 개발해 노르웨이 전선에서 쓰이게 했고, 군인과 군수품을 해상에서 곧장 해안으로 보낼 수 있는 상륙전용 유압식 파이프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압권은 '하버쿡(Habakkuk) 프로젝트', 즉 빙산 항공모함 구상이었다. 펄프 등을 섞어 만든 대형 빙산으로 모함을 건조해 독일 U보트 공격에 시달리던 해군력을 보충하자는 것. ‘파이크리트(Pykrete)’라 불린 그의 특수 얼음은 녹는점이 높아 내구성과 강도가 입증됐고, 무엇보다 선박 건조 시간과 비용 면에서 대단히 경제적이어서 연합군 수뇌부의 마음까지 샀지만, 부력 등 구조공학적 허점이 밝혀지면서 몽상에 그쳤다.
우울증을 앓던 그는 전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일간지 더타임스(The Times)는 그를 “금세기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고 부고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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