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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오스, 잘 가" 두 아들과 아내 살해범, 그의 목소리는 녹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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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건의 이면과 뒷얘기를 '사건 플러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네, 119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칼에 찔려 있어요. 모두 죽었어요."
'광명 세 모자 살인사건' 최초 신고 대화
지난해 10월 25일 자정이 가까운 시각. 중년 남성이 흐느끼며 전화기를 들었다. 자신의 아내와 중학생(15), 초등학생(10) 아들이 전부 흉기에 찔려 숨을 거뒀다는 신고였다. 경기 광명시 아파트로 출동한 경찰과 구급대원은 피를 흘린 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세 모자를 발견했다.
평범한 가정의 엄마와 두 아들이 한날 한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사회도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튿날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최초 신고자였던 남성이 긴급체포된 것이다. 아내와 두 아들을 무참히 해친 인물은 다름 아닌 세 모자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고모(46)씨였다.
경찰은 주변 폐쇄회로(CC)TV를 분석해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날 저녁 아파트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옷차림이 달라진 고씨를 추궁했다. 고씨는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다. '광명 세 모자 살인사건'은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인면수심 가장의 이야기지만, 안타까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범행 전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광명서 숨진 채 발견된 세 모자... 범인은 가장이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02615070004127)
고씨는 피붙이인 자식들과 아내의 머리를 목공용 고무망치로 내려치고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범행도구와 혈흔이 묻은 옷가지를 집 앞 수풀에 버려 범행을 숨기려 했다. 그는 당초 외상을 입히지 않게 고무망치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킨 후, 극단적 선택으로 위장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쉽게 기절하지 않자 흉기로 10여 차례 찌른 것으로 드러났다.
고씨의 인면수심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씨는 범행 직후 근처 PC방으로 걸어가 두 시간 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연히 휴대폰을 들어 '119'를 눌렀다. 신고 기록에 남은 그의 울음은 '가족을 잃은 허망함'이 아닌 '계획 살인의 마무리'였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고씨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그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며 "8년 전 기억을 잃었다. 최근 코로나에 걸린 뒤 기억을 되찾았다. 내 안엔 3개의 인격이 산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수사당국은 고씨의 구체적인 범행 동기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실타래를 푼 건 큰아들의 휴대폰이었다. 큰아들은 장기간 아버지 육성을 녹음으로 남겼다. 아들이 기록한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수원지검 안산지청 형사2부(부장 김재혁)는 아들 휴대폰에 남은 30여 개의 녹음파일을 분석했다.
사건 발생 3주 전, 큰아들의 녹음이 시작됐다. 14분짜리 파일엔 격노한 고씨의 음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왜 내 슬리퍼를 허락 없이 신고 가냐"는 잔소리는 "내가 X발 저 XX한테 뭘 못 해서" "내가 너는 죽어도 용서 못 해 이 X발 새끼야" 등의 폭언으로 이어졌다. 아들은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큰아들은 녹음기를 켰다. 하루는 현관 앞에 선 아들이 혼잣말을 했다. "들어가기 무섭다. 죽지는 않겠지? 들어가면 무시하거나 '넌 뭐야 이 새끼야'라고 하거나 'X새끼'라고 하니깐." 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세 모자가 떠난 그날도 아들 휴대폰에는 '소리'가 고스란히 남았다. 녹음시간은 장장 15시간. 참극 3시간 전쯤부터, 다음 날 오전 경찰이 휴대폰을 발견하고 정지 버튼을 눌러 멈출 때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10월 25일 오후 5시. "잠시 얘기를 하자"며 고씨는 큰아들을 불렀다. "그간 상처받은 게 있다면 미안하다. (전날 이혼하기로 했지만) 네 엄마와 화해했다. 잘 지내보자"라며 웃는 아빠의 제안에 아들은 "네"라고 답했다.
하지만 아빠는 3시간 후 돌연 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고씨는 의식을 잃은 큰아들을 향해 "나 죽는 거죠? 그렇지!"라며 자문자답하기도 했다. 목숨을 붙들고 있는 큰아들을 향해 짜증 섞인 말도 내뱉었다.
고씨는 피를 흘린 채 쓰러진 큰아들의 모습을 보고 절규하는 아내를 향해서도 흉기를 휘둘렀다. 이어 샤워를 하고 나온 둘째 아들까지 ‘범행 장면을 봤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했다. 고씨는 마지막으로 소름 끼치는 한마디를 남겼다. "아디오스(Adiós), 잘 가." 세 모자는 고씨의 만행이 이어지는 동안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검찰은 고씨가 2년 전 실직한 뒤 경제적 문제로 가족과 갈등을 겪었고, 그간의 분노감이 증폭돼 범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고씨는 검찰 조사에서 "'명', '소심이', '쩐'이라는 세 개의 인격이 매일 바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각각의 특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고씨는 다중인격을 주장하는 통상의 살인범과는 확연히 달랐다. "범행한 건 내가 아닌 다른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대다수 사례와 달리, "살인을 저지른 건 내 인격(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팀을 이끈 김재혁 검사도 이 점을 주목했다. "범행을 저지른 건 자신의 인격(명)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범행 직후 PC방에 간 건 다른 인격(소심이)이라고 한 거죠." 수사팀 입장에선 이런 진술도 향후 법정에서 고씨의 책임 능력에 영향을 줄지 판단해야 했다. 고씨가 다중인격 장애를 가진 게 맞는다면, 심신미약자에 대한 책임 감경 사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팀은 대검찰청에 고씨에 대한 통합심리분석을 의뢰했다. 결과는 '이상 소견 없음'이었다. "큰아들이 용기만 있으면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8년 전 기억을 잃었다"는 고씨의 진술도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수사팀은 통합심리분석 결과에 더해, 고씨의 고교 생활기록부와 병원 진료기록도 들여다봤다.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주요 강력사건에선 피의자 진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 피의자의 인지・성격상 특징 및 사이코패스 여부 등을 확인해 수사와 공판 단계에서 객관적인 양형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크게 ①심리생리검사 ②행동분석 ③임상심리평가 기법이 있다. ①심리생리검사는 호흡, 맥박 등을 관찰해 거짓 여부를 판정하고, ②행동분석은 말투와 표정, 몸짓 등을 관찰해 진술의 진위 여부를 추론한다. ③임상심리평가는 면담을 통해 정신병리적 특징이나 성향 등을 파악한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17일 고씨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안산지원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그는 "현재 상황이 현실 같지 않지만 제가 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도의적으로 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안다"고 울먹였다. 고씨는 하지만 재판 준비 단계에선 "TV에서 봤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가 돌연 철회하기도 했다.
고씨는 법정에서도 다중인격 장애와 기억상실증을 주장했다. 유족 측은 분노하며 "기억상실은 사실무근"이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직권으로 고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고씨는 두 번째 재판에서 "모든 걸 인정하니 제발 나를 사형시켜달라"고 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느낀 성찰이었는지, 감형을 위해 던진 말인지는 재판에서 가려지겠지만, 검찰은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해서라도 공소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일가족을 살해하고도 기억상실을 주장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며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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