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선동 시대 살아가기

숏폼 선동 시대 살아가기

입력
2023.02.18 04:30
22면

숏폼 유행으로 자극적인 정보 부각
전후 맥락 제거한 이미지 조작까지
정치선동 휩쓸리지 않는 사유 힘 필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영화 '극장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극장전'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홍상수 감독의 좀 오래전 영화 ‘극장전’(2005년)에서 배우 김상경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런 독백을 한다.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극장전’은 영화를 보고 나온 주인공의 무의미한 듯한 일상을 보여준 뒤 이런 뜬금없는 결심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희미해졌지만, 저 독백만은 이상하게 머릿속에 꽂혔다.

이 대사가 다시 떠오른 것은 우리가 이제는 생각하는 것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껴져서였다. 영상마저 내용을 압축한 요약본이나 짧은 숏폼이 대세가 된 상황만 봐도 그렇다. “핵심만 봐도 재미있는데, 뭣하러 시간을 들여 다 보냐”고 하지만, 이야기의 기승전결이나 전후맥락을 살피는 노력이 없다 보니 결국엔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와 정보에만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본래 생각 없이 즐기는 킬링 타임용이라고 여긴다면 숏폼이야말로 가장 진화한 형태겠지만, 우리의 세태가 점점 더 생각과 사유를 불편하게 여기는 징후일지 모른다. 최근 리얼리티 예능이 단순한 경쟁과 놀이를 넘어서 아예 근육과 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피지컬’로 나아가는 것도 이런 풍조를 반영하는 것 같다. 고대에는 육체를 정신의 감옥쯤으로 여기는 철학 사조도 있었지만, 이젠 육체 해방을 위해선 무사유가 필요조건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화제인 인공지능 ‘챗GPT’를 봐도 생각과 사유마저 인스턴트식품처럼 간편하게 서비스되는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 ‘사드 추가 배치’ 식의 단문 공약으로 짭짤한 재미를 봤다. 이에 질세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숏폼 공약에 열을 올렸다. 공약의 내용과 맥락보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을 자극하는 단편적 정보와 이미지였다. 정치인들은 요즘 유권자들 풍토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일까.

오히려 단편적 이미지와 정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은 정치 선동가들이다. 얼마 전 고민정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동훈 법무장관에게 “대법원 판결이란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온라인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고 의원 입장에서 이 질문은 박진 외교부 장관을 추궁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일본과 협상해선 안 된다는 취지였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각인시키려는 나름 재치 있는 질의였으나 고 의원 질의와 이를 어이없어하는 한 장관 답변만으로 편집된 숏폼 영상만 보면 고 의원은 기초 상식도 없는 지진아로 비친다. 전후 맥락을 제거한 숏폼이 진영 간 조롱과 분노의 연료로 이용되기 딱 좋은 것이다. 이런 식의 숏폼 선동은 여야가 따로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일부분만 떼내 편집한 동영상도 야권 진영에선 좋은 먹잇감이다.

정보와 이미지 조작에 해당하는 이런 숏폼 선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정보의 맥락을 두루 살펴봐야 한다. 시간을 들여 여러 정보와 의견을 접하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쪽은 숏폼에 익숙해진 이들이다. 남의 이데올로기와 남이 조작한 이미지와 수사에 시간을 뺏기고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게 보내기 때문이다. 영화 ‘극장전’에서 주인공의 뜬금없었던 독백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송용창 뉴스2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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