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이번 혁명 희망적" 자신한 Z세대…"무식한 탄압은 무섭지 않다"

입력
2023.02.16 09:50
4면
구독

[쿠데타 2년, 미얀마에 가다]
②미얀마 혁명 주역, Z세대
일등공신 페이스북, SNS로 화력 높여
군부 인터넷 차단에도 VPN 우회접속
높은 민주주의 이해도, 투쟁 동력으로

편집자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로 합법적인 민주 정부를 무너뜨린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미얀마인들은 총을 들고 싸웁니다.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미얀마인들은 과거의 우리와 닮았습니다. 한국일보는 한국 언론 중 처음으로 남동부 카렌주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 군부와 싸우는 시민방위군(PDF)과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학생군의 민주주의 수호 전쟁을 취재했습니다.

지난해 8월 독일 베를린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열린 '미얀마 8888항쟁' 기념일 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독재 하의 마지막 세대가 되자"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해 8월 독일 베를린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열린 '미얀마 8888항쟁' 기념일 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독재 하의 마지막 세대가 되자"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1948년 영국연방에서 독립한 미얀마는 1962년 군부 집권 이후 반세기 동안 군정 치하였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미얀마인들은 끈질기게 싸웠다.

'8888항쟁'이 대표적이다. 1988년 8월 8일 네 윈 독재 정권에 맞서 미얀마 전역에서 20대를 주축으로 일어난 시위다. 무차별 진압으로 3,000여 명이 사망했다. 결국 네 윈 정권이 힘을 잃었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네 윈 정권을 축출하는 또 다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가 불 지핀 민주 투쟁의 결말은 다를까. 미얀마에서 만난 20대와 8888항쟁의 주역들은 한 목소리로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왜일까.

기는 군부, 나는 청년들... '아는 게 무기'

가장 큰 차이는 인터넷이다. 미얀마에서 페이스북은 혁명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미얀마 인구 5,300만 명 중 2,700만 명이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페이스북을 인터넷의 동의어로 아는 사람도 많다.

2021년 이후 거리 시위에 나선 청년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시위 일정, 장소, 동선 등을 공유했다. 국경을 초월해 세계 시민과 연대했다. 세이브미얀마(#SaveMyanmar), 미얀마쿠데타(#Myanmarcoup), 군부를거부한다(#Reject_the_Military) 등의 해시태그를 단 글을 올려 국제 여론전에 화력을 쏟아붓기도 했다.

2019년 8월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8888항쟁' 기념행사에서 한 시민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얼굴이 그려진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곤=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9년 8월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8888항쟁' 기념행사에서 한 시민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얼굴이 그려진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곤=A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8년 시민들의 의지가 부족했던 건 아니다. 싸우겠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은커녕 유선전화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라 힘과 열기를 조직적으로 모으지 못했다. 시민들은 다음 시위 일정을 입소문으로 전해들었다.

요즘 군부가 페이스북을 가만 놔둘 리 없다. 미얀마 정보통신부는 “국가 안정을 저해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가짜 뉴스와 오보를 퍼뜨려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며 페이스북 접속을 차단했다.

청년들은 군부보다 영리했다.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가상사설망(VPN)을 통해 페이스북에 우회 접속했다. 군부는 인터넷을 끊는 것으로 응수했다. 청년들은 지지 않았다. 이웃 나라인 태국의 휴대폰 유심을 사용해 인터넷에 접속했다. 인터넷 비접속 상태여도 블루투스를 통해 100m 거리 안에 있는 스마트폰끼리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앱)도 이용했다.

미얀마 민주세력 임시정부인 국민통합정부(NUG)의 자원봉사자인 보헤이(29)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덕분에 시민들의 참여가 확 늘었다"고 했다. 또 "한국인들과의 온라인 연대를 통해 한국도 과거에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우리도 한국처럼 성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22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진행된 시위 현장으로 경찰 병력이 이동하자 시민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있다. SNS 캡처

22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진행된 시위 현장으로 경찰 병력이 이동하자 시민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있다. SNS 캡처

시위 자금을 모으는 데도 온라인 소통이 효율적이다. 딴센텅(27)은 “1988년에는 인터넷이 없어 해외에 나간 미얀마 노동자들이 고국의 사정을 알기 어려웠고 지원 자금을 보내기도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했다. 이어 “미얀마의 민주 저항 역사상 지금처럼 시민 연대가 튼튼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높아진 민주주의 이해도...달라진 가치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도 달라졌다. 8888항쟁 당시엔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뭔지 잘 몰랐다. 2015년 총선에서 민주진영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집권해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민주주의를 체험한 시민들이 늘었다. 투쟁의 동력도 그만큼 늘었다.

8888항쟁 때 몬지(52)는 17세였다.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에서 학생군으로 활동하다가 태국으로 망명한 뒤 2021년 쿠데타 이후 시민방위군(PDF)으로 복귀했다. 그는 “35년 전엔 미얀마에 신문사가 2개밖에 없었고, 군부의 말을 받아 쓰기만 했다"며 "왜 싸워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것부터 힘들었지만, 요즘은 그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청년들의 유전자(DNA)도 달라졌다. 싱가포르 소재 동남아연구소(ISEAS)는 미얀마의 20대를 분석하며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반군부에 그치지 않고 △탈권위주의 △반인종주의 △성차별 거부 등을 포괄한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큰 만큼, 싸움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매솟(태국)= 허경주 특파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