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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너를 안아야 할 팔로 총을 든단다"...미얀마 시민군의 슬픈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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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로 합법적인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군정은 폭력과 공포정치로 국민을 탄압합니다. 미얀마 사태는 그러나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져 ‘잊힌 비극’이 됐습니다. 미얀마인은 스스로 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고.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미얀마인들은 과거의 우리를 닮았습니다.
한국일보는 미얀마를 찾았습니다. 한국 언론 중 처음으로 남동부 카렌주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 군부와 싸우는 시민방위군(PDF)과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학생군의 민주주의 수호 전쟁의 처절한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내 이름은 조자(36·가명). 미얀마 동부 카렌주(州) 타나먀 마을에 8세, 3세 된 두 아들과 함께 살던 싱글맘. 이웃들은 ‘솜씨 좋은 재봉사 조자’라고 불렀지. 1년 전까지는. 지금은 ‘시민방위군(PDF) 백호부대 3사단 전투병 조자’야.
2021년 2월 1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미얀마를 접수했어. 그 전까진 내가 재봉틀 대신 총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우리가 항의하면 군정이 물러갈 줄로만 알았어.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순진했지.
우리는 평화적으로 따졌어. 총칼은커녕 나무 막대기조차 들지 않고 시위를 했어. 민주주의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뿐인데 시위 현장은 순식간에 '살육의 지옥'이 됐어. '쉭' 하는 소리가 나더니 나와 나란히 행진하던 친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어. 앞사람 얼굴 옆으로도 총알이 스쳤어. 군경이 총과 곤봉을 들고 우리한테 달려들었어. 사람들이 끝도 없이 얻어맞고 어딘가로 가축처럼 끌려갔어.
다들 죽거나 감옥에 갇혔어. 산송장이 된 채로 풀려난 사람도 많아. 수배자를 찾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경은 수배자 가족의 집에 불을 질렀지. 그럴수록 우리는 목청을 더 높였어. 하지만 쿠데타 군부는 들을 생각이 없었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구호를 쓴 종이를 한 명, 두 명씩 내려놓기 시작했어. 대신 무기를 들었어. “이웃 마을 XX가 시민군이 됐다더라” 같은 소문이 매일 들려왔지. 나도 싸워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어.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1년을 더 참고 기다렸어. 괴로웠어. 눈을 감으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떠나간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거든. 망설이는 사이 삶은 더욱 팍팍해졌어. 밥벌이가 뚝 끊긴 것보다, 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군인이 시민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상황보다, 내 아이들에게 자유가 사라진 미래를 물려줘야 하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어.
나도 결국 싸우기로 했어. 지난해 3월 어느 새벽에 가방 하나만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어. 엄마가 떠나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어. 내 엄마는 나를 잡지 않으셨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셨지. 엄마의 눈동자가 너무 슬펐어.
그날 이후 내 삶은 180도 바뀌었어.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는 굉음이 들려. 동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만 무섭진 않아.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했으니까. 땅바닥에서 잠드는 것도, 먹을 게 없어서 끼니를 거르는 것도 나는 잘 참아내. 처음엔 총의 어디에 총알을 넣어야 하는지, 장전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허둥댔지만 이제는 총이 내 몸처럼 느껴져.
바라는 건 딱 하나야. 하루라도 빨리 자유, 정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 아이를 품에 안는 것. 그러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고 살아남는 것. 아이들이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말도 아까워서 못 하겠어. 매일 아이들에게 마음의 편지를 써.
'멀리 떠나와서 엄마가 미안해. 외롭게 해서 미안해. 꼭 안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엄마는 혼자만 숨어 있고 싶지 않았어. 모두가 자유로운 나라, 민주주의가 당연한 나라를 엄마가 꼭 만들어 줄 거야. 이런 엄마를 언젠가는 이해해 주기를….'"
※한국일보가 미얀마에서 만난 조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과 탱크를 앞세운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그날 이후 평범한 시민들은 투사가 됐다. 해가 뜨면 학교나 일터에 가고 해가 지면 가족,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시작부터 총을 든 건 아니었다. ‘미얀마의 봄’을 위해 시민들은 세 손가락을 높이 들고 거리로 나섰다(하늘을 향해 검지, 중지, 약지를 펼치는 건 영화 '헝거게임'에서 유래된 태국, 홍콩 민주투쟁의 상징이다). 시민들은 군부 퇴진과 중단 없는 민주화를 촉구했다.
시민들의 염원에 군부는 물대포로 답했다. 최루탄, 고무탄, 실탄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였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삼거나 시위 참가자가 있는 곳을 대라며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군부의 폭정에 스러지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로 했다. 어떤 이들은 도심에서 지하저항군(UG)으로 활동했고, 어떤 이들은 국경지대 소수민족 무장조직을 찾아가거나 민주 진영 국민통합정부(NUG)가 창설한 군사 조직 시민방위군에 입대했다.
한국일보는 미얀마와 태국 접경지대 밀림 깊은 곳에 은신한 시민군을 어렵게 찾아가 만났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4일까지 함께 생활하며 취재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들어오기 전까지 총은 만져 본 적도 없었다”며 “평범한 삶을 되찾고 미얀마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살상무기를 드는 역설적 상황을 기꺼이 택했다”고 했다.
공식적인 미얀마 시민군 수는 집계되지 않았다. 남동부 카렌주의 한 장교는 카렌주에만 3만4,000여 명의 시민군이 있다고 귀띔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웅또이(40)도 그중 하나다. 미얀마의 바이올린 거장 우딩히를 사사하고 양곤의 유명 악단에 소속돼 있던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예술가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시민군에 입대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유혈투쟁을 선택한 건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동료 연주자들과 거리로 나갔다. 군부가 잘못했다는 걸 깨우쳐 줘야 할 것 같았다. 6개월 넘게 목이 터져라 '군부 타도'와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지만 변한 건 없었다. 군부는 더욱 잔혹해졌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향해 총을 쐈고, 오토바이를 탄 시위 참가자들을 일부러 차로 쳐서 쓰러뜨린 뒤 곤봉으로 폭행했다. 그때 떠올렸다. “지금처럼 조용히 맞서면 바뀌는 게 없겠구나.”
2021년 8월 아웅또이는 분신과도 다름없던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카렌주로 향했다. 밀림 속에서 4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끝에 저격수가 됐다. 바이올린을 켜던 손과 팔의 세밀한 감각이 목표물을 미세하게 조준하고 방아쇠를 정확하게 당기는 데 도움이 됐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에 몇 번이나 투입됐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세지 않는다. ‘오늘은 살아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다.
아웅또이는 ‘평화를 되찾으면 다시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마음을 푹 놓고 혼자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래도 꿈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아웅또이는 내친김에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가 생활하는 카렌주 미야와디 타운십(기초행정구역) 레이케이코의 한 초소엔 캐논 변주곡의 선율이 구슬프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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