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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넘을 위해 고른 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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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2월 10일, 미국 뉴욕시 그레이스 성공회 교회에서 ‘세기의 결혼식’이라 할 만한 예식이 치러졌다. 연미복 입은 신랑과 레이스 장식 드레스에 면사포 쓴 신부를 보기 위해 취재진과 군중이 몰려들었고,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도 배치됐다. 메트로폴리탄 호텔 결혼 리셉션장에는 입장료만 무려 75달러였고, 입장권 5,000장은 금세 매진됐다. 리셉션장 한쪽에 산더미처럼 진열된, 세계 각지에서 신랑 신부에게 보내온 선물들-모피, 장신구, 은식기 등-도 구경거리였다. 부부는 그랜드피아노 위에 우뚝 서서 하객들의 축하를 받았고, 다음 날 신문들은 ‘요정의 결혼식’이란 제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부부는 왜소증(저신장증)을 지닌 당대의 서커스 스타로, 신랑 찰스 셔우드 스트래턴(Charles S. Stratton, 1838~1883)과 신부 라비니아 워렌 스트래턴(1841~1919)의 당시 신장은 각 90㎝와 76㎝였다. 그들은 쇼비즈니스를 세계적 규모로 일군 흥행업자 P.T 바넘(Phineas Taylor Barnum, 1810~1891)의 서커스단원으로 만나 미국과 유럽 각국을 돌며 춤과 노래와 연기로 큰 인기를 끌어 유럽 여러 왕실에 초대받기도 했다. 부부는 워싱턴D.C. 신혼여행 중 에이브러햄 링컨 당시 대통령 부부의 백악관 만찬에도 초대받았다.
부부는 그들 체형에 맞춰 제작된 집기들을 갖춘 뉴욕 부촌의 저택과 코네티컷 별장, 호화 증기요트까지 소유할 만큼 부유했고, 바넘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바넘과 스트래턴은 훗날 대등한 사업파트너로 지내기도 했다. 근년의 잣대로 바넘은 프릭쇼 대중화 등 여러 반인권적 행태 때문에 나쁜 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는 드물게 정직한 에이전트였고,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의료자선사업가였다.
찰스 스트래턴이 만 45세에 뇌졸중으로 숨지자 바넘은 그의 실물 크기 전신상을 제작해 묘석 위에 세웠다. 그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장애가 있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당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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