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왜 유학 가? 우리 학교가 이렇게 스마트한데"...루마니아 소도시의 역발상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교육은 개인을 성장시키고 국가 미래를 계획하는 기틀이다." 이 말을 부정하는 이가 있을까.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에 교육권을 새겨 둔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쓰여 있다.
학교는 교육이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다. 그러나 '학교가 교육권을 보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인구가 소멸하는 지방의 학교는 특히 그렇다. 학생 수가 적으니 교육 환경 개선은 뒷전이다. 학생들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더 큰 학교로 떠나고, 작은 학교는 사라지곤 한다. 지방 학교의 악순환이다.
루마니아 북서쪽의 소도시 치우구드시의 학교들도 2018년까지는 악순환의 늪에서 허덕였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져 학생들이 몰려든다. 비결은 학교에 대한 시 당국의 대대적인 지원이었다. 시는 '사람이 있는 곳에 투자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좋은 학교를 지으면 학생들이 돌아온다'는 역발상에 도전했다. 교육 시설은 물론 교육 체계까지 몽땅 바꿨다. 루마니아 공립학교 최초의 '스마트 스쿨'은 그렇게 탄생했다.
트란실바니아 알바주에 속한 치우구드. 수도 부쿠레슈티로부터 360㎞가량 떨어져 있고, 인구 3,500명 안팎이 산다.
12일(현지시간) 치우구드에 도착하자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전체 면적(4,300만㎡)의 70%가 밭과 초원이었다. 길에는 말과 양이 유유히 거닐었다. 건물은 대부분 단층이었다. 70㎞ 정도 떨어진 공항에서 치우구드까지는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4, 5시간이 걸린다.
주민들은 자연을 곁에 두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이곳의 삶을 아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하진 않았다. 교육 문제가 대표적이었다.
학교의 환경은 열악했다. 수십 년 동안 관리∙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칠판 등 기본적인 교구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컴퓨터, 태블릿PC 등 전자기기를 활용한 수업은 상상 못할 일이었다. 컴퓨터는 실습 시간에만 만질 수 있었다.
교육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건 더 큰 문제였다. 워낙 작은 지역이라 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아이들은 수준별 수업은커녕 학년별 수업도 들을 수 없었다. 교사 한 명당 학생 수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여러 학년이 뒤섞여 공부해야 했다. 한 교사는 "1, 3학년을 묶고, 2, 4학년을 묶어 수업했다"고 말했다. 학습 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엔 보충 학습을 해줄 여유도 없었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인근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강 건너에 위치한 알바이 울리아(알바주 주도)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편도 5, 6㎞를 이동해 학교를 다니는 건 고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오르게 다미안 시장과 치우구드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되찾아오자"고 의기투합했다.
교실엔 컴퓨터부터 설치했다. 수업에서 활용되는 온라인 자료에 인터넷만 있다면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게 됐다. 컴퓨터와 연동되는 스마트 칠판도 놓였다. 교사가 칠판에 쓰는 것들은 실시간으로 파일로 저장됐다. 고성능 카메라도 달렸다. 질병 등으로 결석해도 집에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가상현실(VR) 기기도 수십 대가 비치됐다.
정보통신기술(IT)이 발달한 한국의 눈엔 익숙한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선 혁신 그 자체였다. 영어 및 프랑스어 교사 미하엘라 룬구씨는 "다른 학교에서도 수업을 해봤지만 이런 시설은 찾을 수 없다"며 "좋은 장비 덕분에 학습 능률은 물론 아이들 태도도 좋아졌다"고 했다.
건물도 똑똑해졌다. 스마트 스쿨에 설치된 센서는 움직임을 감지해 자동으로 조명∙온도를 조절한다. 교실 바닥에 너무 많은 물이 감지되면 홍수 경보가 울린다. 실내 이산화탄소 농도가 짙어지면 관리자에게 환기 신호를 보낸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도 높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였던 교육 체계를 바꿨다. 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스마트 스쿨' 한 건물로 통합했다.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 수를 늘려야 학년별 수업을 제공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스쿨을 여는 데는 100만 유로(약 13억4,000만 원)가 투입됐다. 지역 규모를 고려하면 단일 프로젝트에 쓰인 금액으로는 거금이었다. 그래서 유럽연합(EU) 기금 50만 유로(약 6억7,000만 원)를 적극 활용했다. 이탈리아 싱크탱크 산하 매체는 "루마니아에서는 '국민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프로젝트'를 EU 기금으로 추진한 적이 별로 없었다"며 스마트 스쿨을 긍정 평가했다.
학생들이 반응했다. 스마트 스쿨 사업을 총괄하는 단 룬구씨는 "스마트 스쿨 개교 전인 2018년에는 치우구드 소재 학교에 다니는 초등·중학생 수가 104명이었는데, 지금은 265명"이라며 "다른 지역에 빼앗겼던 아이들이 마을로 돌아온 건 물론, 주변 지역에서 유학을 오고 있다"고 말했다.
재학생 루카 치오루타(14)는 "교육 시설, 교육 품질 등이 월등히 좋아서 학교 다니는 게 기쁘다"고 했다. 치오루타도 알바이 울리아 소재 중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최근 돌아왔다.
루마니아 중앙 정부도 성취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2020년 모범 도시로 선정하고 사례 연구를 하고 있다. 루마니아 다른 지역의 마을은 물론 폴란드, 독일 등 주변국에서도 치우구드의 노하우를 배우려 찾아온다. 단 룬구씨는 "400개 이상의 마을에서 우리 마을을 방문했고,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똑같은 학교를 지어준 마을도 여럿이다"고 말했다.
다미안 시장은 "아이들 교육 문제가 늘 마음의 짐이었는데 이제야 해소됐다"며 기뻐했다. 그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은 지방 학교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는 곳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투자가 필요한 다른 곳도 적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국민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헌법 정신을 지키고 싶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바꾸는 핵심이다. 진작 살펴야 했던 문제이지만 예산 확보 등 현실적 제약 때문에 늦어졌다."
-스마트 스쿨 설립 후 학생 수가 두 배 이상 뛰었다.
"도시의 눈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숫자다. 10㎞ 이상 떨어진 다른 마을의 학생들도 '치우구드 유학생'이 되고 싶어한다. 한때 아이들을 빼앗겼던 우리 마을은 이제 아이들을 빼앗는 마을이 된 것을 걱정하게 됐다. (웃음) 우리의 노하우를 많이 전파해 제2, 제3의 치우구드가 탄생하길 바란다."
-학교가 인구 유입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고 보나.
"좋은 학교가 있는지가 도시 정착을 결정하는 데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치우구드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교육 걱정이 사라지자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모의 정착이 많아졌다. 2000년 내가 시장에 처음 당선됐을 때 주민 평균 나이가 50세 정도였는데, 지금은 38세로 줄었다. '도시의 눈'으로는 작은 변화일 수 있겠지만, 규모가 작은 시골에선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다. 도시가 살아나고 있다."
-행정 서비스 역시 온라인으로 전환해 화제가 됐다. 스마트 사업을 강조하나.
"루마니아 전체(2021년 기준 1,912만 명)로 보면 인구 47.5%가 농촌 등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거주 면적으로 따지면 87%에 해당한다.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을까? 지방자치단체장에게는 지역별 격차를 계속 좁혀가야 할 의무가 있다."
학생들이 '저절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스마트 스쿨을 정착시키기 위해 시와 학교는 발로 뛰었다. 스마트 스쿨의 테오도라 시미온 교장은 개교 직전인 2019년 7월을 이렇게 회상했다. "부시장, 선생님들이 치우구드에 사는 학생들의 집 하나하나를 찾아갔다. 부모들을 만나 학교 시설과 수업 체계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더 이상 학생들을 시 바깥으로 보내지 말라. 믿고 맡겨 달라'고 설득했다."
설득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시미온 교장은 "흔쾌히 동의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교육 개선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치우구드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예술가 부부 마르첼과 올가도 최근 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알바이 울리아에 정착하려 했으나 치우구드로 오게 됐다"며 웃었다. 부부의 큰아들은 스마트 스쿨에, 작은딸은 스마트 스쿨을 본떠 만든 스마트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스마트 유치원은 올해 1월 문을 열었다. 스마트 유치원 사업에는 160만 유로(약 21억4,000만 원)가 들었다.
치우구드엔 조만간 '제2의 스마트 스쿨'도 설립된다. 밀려드는 학생들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 룬구씨는 "한 교실당 최적 학생수는 20명 안팎이라고 생각한다"며 "무작정 받으면 수업의 질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새로 학교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 학교는 공원 한가운데에 지어지고, 스포츠 시설을 갖추게 될 것이다. 스마트 스쿨 개교로 인해 비게 된 학교 건물들은 교육 센터 등으로 바꿀 계획이다.
치우구드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지방이 꼭 대도시의 모습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육과 같은 기본권을 누리는 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단 룬구씨는 "교육은 한 마을을 업그레이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살고 싶은 마을로 만드는 것이 지자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