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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결국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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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다." 지난 연말 저녁을 먹다 어느 선배가 불쑥 꺼낸 얘기였다. 대학시절 친구 집에 이 문구가 걸려 있는 걸 봤는데, 강렬하게 와닿았다고 했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는 식의 노래가 대학가를 풍미하던 1980년대 학창시절에 ‘인생은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니, “참 조숙했네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1990년대에 대학에 입학했던 나만 해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를 목청껏 부르는 게 일상적 뒤풀이 풍경이었다. 개인주의나 자유주의가 부르주아의 정치철학이라고 믿었던 때였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이가 들고, 여러 취재 현장의 경험이 쌓일수록 대학시절의 그런 감성은 희미해져 갔다. ‘우리’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영광과 영리는 언제나 깔끔 떨며 제 잇속 챙기는 이들의 몫이란 게 살면 살수록 터득하게 되는 생활의 이치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당연한 명제지만 대개가 약자, 소수자, 피해자를 자처하는 터라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연대'니 '정의'니 하는 말이 이권 투쟁에서 그럴듯한 포장지로 이용되는 모습을 보며 쌓여 가는 것은 냉소적 혼잣말이었다. 인생은 결국 혼자, 각자도생이다, 그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 보수화하는 것도 대개 이런 체험을 했기 때문일 터.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명제는 그러므로 인생 황혼기의 철학인 셈이다.
나이깨나 들어 알게 된 이런 이치가 요즘 젊은이들에겐 상식이다. 대단한 깨달음인 양 비장한 듯 시니컬하게 혼자 중얼거렸던 ‘각자도생’을 이젠 누구나 대놓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애늙은이가 된 걸까. 이런 것도 선행학습과 조기교육 덕분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젊은 세대가 단박에 벌거벗은 임금님의 진실을 보게 된 건 우리 사회 자체가 황혼기에 접어든 탓일 테다. 고령화 시대란 인구학적 추이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곳곳에서 쇠락의 징후가 만연한 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런 황혼기의 철학이 지배적 풍조가 되도록 한 전환적 계기였다.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인생은 혼자’라는 명제를 물리적이고 시각적으로 전면화했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는 시 구절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모두가 늙어버린 사회가 왔다. 한국일보가 오피니언 리더 100명을 대상으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과 이를 회복하는 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대다수가 거론한 게 각자도생의 사회였다. 그로 인해 공동체 의식, 즉 ‘우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회복하자는 게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척 ‘우리’를 외쳐 봐야 누가 수긍하겠는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옭아맸던 구속의 역사가 지워질 수도 없다. 차라리 철저하게 혼자로 돌아가 자신의 내면을 더 들여다보고 보살피는 게 모두가 혼자라고 떠드는 세계를 살아가는 지혜일지 모르겠다. 다들 '각자도생'을 외치지만 실은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기성 질서의 잣대와 가치를 내면화해 상대를 선망하거나 질투하고 혐오하는 것은 아닌지.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무리들 틈에 끼어 편을 가르는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 ‘인생은 혼자’라는 말에는 더 깊은 뜻이 담긴 것 같다. 혼자인 사람끼리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할 수는 없다. 혼자는 연약하고 쓸쓸하면서도 소중해서다. 그 혼자만의 외로움과 존엄함을 아는 사람들이 힘겹게 손을 잡는 것, 그게 우리가 회복해야 할 연대의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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