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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대, 생존 불평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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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뉴스룸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쪽파 반 단, 그리고 양파 4개. 지난주 동네 마트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내고 손에 쥘 수 있었던 채소의 총량이다. 설 연휴를 보내고 더욱 눈에 띄는 식재료값의 오름세가 두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쪽파 대신 대파를 사서 적당히 잘라 사용하고, 양파 없는 제육볶음을 먹으면 피해 갈 만큼의 오름폭이기도 하다. 한 판에 8,000원 정도 줘야 살 수 있는 달걀값이 부담스러워졌다면, 상대적으로 덜 오른 미국산 냉동우삼겹으로 단백질을 보충해도 된다. 엄밀히 말해, 중산층 소비자에게 이미 일상화된 생활물가 인상 추세가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란 얘기이다.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떨어졌지만, 2023년의 우리는 보리 혼식을 권장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만큼도 쌀을 먹지 않고 있다. 인플레가 심해진 가운데 대체재 시장도 확대되면서 소비 선택지가 급속히 소실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한파에 맞춰 날아든 난방비 고지서로 드러난 에너지 인플레의 실체는 쪽파나 양파값과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 보편적 복지와 최저임금의 곁불을 쬐며 견뎌온 약자들이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을 만큼의 충격파가 그것이다.
생활비 중 난방비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손님이 줄어도 조리기를 잠글 수 없는 영세 자영업자, 허술한 단열 탓에 신축 건물보다 비싼 난방비를 부담해야 하는 쪽방촌 주민. 3년 전 코로나19의 첫 번째 희생 대열에 섰던 사회 최약자들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장 날카롭게 상처 입고 있다. 역병과 전쟁, 그리고 기후변화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재난과 맞서야 하는 시대. 단지 먹거리 취향이 제한받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누군가의 생존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대체재 없는 에너지 비용의 쓰나미. 생명을 지켜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방파제가 갖춰지지 않은 이른바 '생존 불평등'의 구역 거주민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1년여 만에 많게는 두 배가량 뛰어버린 가스비 고지서로 성난 민심 앞에서 정치권과 정부는 과연 '누구'를 먼저 떠올렸는지 묻고 싶다.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난방비 이슈를 놓고 벌이는 실익 없는 '네 탓' 공방이다. 집권 2년 차를 맞으면서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고 한일관계 실타래 풀기에 여념 없어야 할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 하락세가 난방비 급등 때문으로 풀이되면서다. 여당은 조금이라도 윤 정부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문재인 정부가 요금을 동결했던 탓"을 연신 강조하며 여론의 화살을 피했다. 이에 맞서는 야당의 입도 바쁘다. "난방비 폭탄은 윤 정부가 예측 가능했다"라며 여당과 정부를 탓하느라 부산하다. 생존 비용이 부족해 더 일찍 더 자주 일터로 나서게 된 사회적 약자들이 출근길에 듣는 시사방송에서 이들 정치인은 대책을 내놓기보다 책임을 떠넘겼고, 자신의 자리에서 뭘 할 수 있는지보다 정적의 비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탈원전 정책 때문에 LNG를 (비싸게) 샀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들으면서 쪽방촌 얼음 계단(위 사진)을 오르는 심정을 알아달라.
정부가 1일 기초생활수급가구와 차상위 계층에 최대 59만 원가량(4개월분)의 난방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은 사태의 심각성이 확인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규모와 대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공공연히 지원 범위를 중산층까지 확대할 것이라 밝히는 여당과 대통령실의 움직임이 아쉽다. 표적이 분명치 않은 무차별 복지이고, 결국 막대한 재정을 소비하면서까지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민심을 끌어안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생존 불평등을 완화해야 하는 당위에 동의한다면 제한된 화력은 가장 떨고 있는 이들을 향해야 한다. 발 빠른 몇몇 지자체는 놀랍게도 벌써부터 모든 주민에게 난방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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