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경찰 손 놓고 있는데... 법원은 이태원 참사 '2차 가해' 막을 수 있을까

입력
2023.01.16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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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불 집회 등 참사 유족 향한 2차 가해 여전
"현수막 철거하라"... 시민들 비난 민원 쇄도
"방법 없다"는 구청, 법원 가처분 판결 주목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3차 시민추모제에서 유족 등 참여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뉴스1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3차 시민추모제에서 유족 등 참여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우리 재현이는 사랑하는 친구를 두 명이나 잃었는데 얼마나 외롭고 그리웠을까.”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3차 시민추모제. 참사 78일째인 이날,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군의 아버지가 겨울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이군은 참사 당일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49재를 나흘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비극적 결정을 내린 배경엔 악성 댓글 등 ‘2차 가해’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역시 참사 트라우마와 극단적 선택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해 그를 159번째 희생자로 인정했다.

분향소 앞 계속되는 2차 가해

참사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2차 가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희생자들을 기려야 할 추모제에서조차 유족을 향해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삼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태가 속출하고 있다. 몇몇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추모제 무대 바로 뒤편에서 보란 듯 확성기를 이용해 맞불 집회를 열었다. 경찰이 공간을 분리한 덕에 양측의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유족들은 “지금이 한가하게 추모나 할 때냐” 등 온갖 막말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추모제에 참여한 청년추모행동 소속 송영경씨는 “유족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면서 기회만 보이면 시비를 걸려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14일 오후 서울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광장에 보수단체의 각종 정치구호가 담긴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김소희 기자

14일 오후 서울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광장에 보수단체의 각종 정치구호가 담긴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김소희 기자

이런 2차 가해는 지난달 14일 서울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도 한 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곳 주변은 보수단체 신자유연대의 정치적 구호가 담긴 현수막으로 뒤덮인 지 오래다. 용산구 주민이라는 한 여성은 이날 추모제를 마치고 분향소로 돌아온 유족에게 “왜 여기서 XX이냐”며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한 유족은 “자식을 잃은 입장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싶다”고 울먹였다.

민원 빗발쳐도 해결책 없어… 결국 법적 대응

시민들도 아무런 제지 없이 자행되는 2차 가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이달 11일까지 120다산콜센터에는 ‘이태원광장에 무분별하게 설치된 현수막과 천막을 철거해 달라’는 내용의 민원이 100건 넘게 접수됐다. 용산구청에 따르면 공식 집계에선 빠졌지만 담당과로 전화하거나 직접 항의 방문하는 주민은 훨씬 많다고 한다. 용산구 온라인 민원 사이트에도 “도가 지나친 발언이나 표현의 현수막을 볼 때마다 불쾌하다” “저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명백한 2차 가해”라는 글이 쇄도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용산구 온라인 민원 사이트에 한 시민이 현수막을 철거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새올 전자민원창구 캡처

지난달 29일 용산구 온라인 민원 사이트에 한 시민이 현수막을 철거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새올 전자민원창구 캡처

그러나 구청과 경찰은 정식 집회신고를 한 만큼 광고물 관리법을 적용해 현수막을 단속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2차 가해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법원 판결뿐이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는 지난달 29일 서울서부지법에 분향소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분향소 반경 100m 내에서 방송이나 구호제창, 현수막 개시 등으로 추모를 방해하는 신자유연대의 행위를 금지해달라는 내용이다. 17일로 예정된 가처분 심문 기일을 앞두고 유족 측은 12, 13일 이틀간 시민 탄원을 받았는데 3만7,000여 장의 탄원서가 모였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는 “집회신고를 했더라도 수위 높은 발언과 도를 넘는 소음 등이 유족들의 인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 일부 제한하는 형태로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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