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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와 파나마의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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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공화국의 역사는 운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다. 16세기 이래 스페인 지배를 받던 파나마는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투쟁으로 1821년 독립했지만, 콜롬비아의 속국 격인 ‘그란 콜롬비아’의 일부로 편입됐다. 차별과 불이익에 19세기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했다가 좌절한 파나마인들을 도운 게 미국이었고 그 조건이 운하였다.
미국은 파나마인들의 폭동을 지원해 1903년 11월 파나마를 독립할 수 있게 했고, 이듬해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총연장 82km 파나마 운하는 1914년 8월 완공됐고, 미국은 운하 운영권을 파나마 정부에 완전 이양한 1999년 12월 31일까지 만 85년간 주둔군 경비하에 운하를 사실상 소유했다. 미국에 남미의 교두보이자 방패인 파나마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해상 관문이었다.
반면 파나마인에게 운하 통제권은 주권의 상징이었다. 2차대전 이후 잦은 반미 폭동이 이어졌고, 군사 쿠데타도 잇달았다. 쿠데타 세력이 미국의 지원과 대국민 지지의 미끼로 꺼내 들던 것도 운하 조약 개정이었다.
정보사령관 출신 군인 마누엘 노리에가(1934~2017)는 1981년 전 독재자 사망으로 권력을 장악, 1989년 축출될 때까지 파나마를 통치했다. 그는 파나마를 남미 마약의 북미 반출 창구로 활용해 축재했고, 운하 운영권 박탈을 협박카드로 활용하며 미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1989년 5월 대선에서 노리에가의 후보가 패하자 노리에가는 ‘미국의 선거 개입’을 빌미로 선거를 무효화했다. 10월 소장파 군부 쿠데타가 시작됐고, 미국은 12월 20일 스텔스 전폭기와 해병대 등 2만7,000여 병력을 투입했다. 노리에가는 24일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시도하다 이듬해 1월 3일 투항했고, 마이애미로 이송돼 마약거래 등 혐의로 40년 형을 선고받고 이후 프랑스와 자국 정부에서도 수감 생활을 했다.
1999년 말 운하 관리권 완전 이양은 파나마의 안정적 친미화의 방증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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