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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섬' 선언으로 돈 벌고 건강도 챙기는 그리스 '뉴 산토리니'의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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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흡연 인구가 많은 나라를 줄 세울 때마다 그리스는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다. 유럽연합(EU) 집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그리스의 흡연 인구는 28.8%. EU 회원국 27개국 중 2위다.
그리스에선 장·차관들이 기자회견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고, 음식과 재떨이가 나란히 놓이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금연 정책이 자리를 잡기에는 척박하다는 뜻. 이런 그리스에서 "100% 금연 섬"을 선언한 마을이 있다. 그리스 남쪽에 자리한 섬, 아스티팔레아다.
중앙 정부도 흡연율 낮추기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가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뭘까. 그 어렵다는 금연을, 아스티팔레아 주민들은 정말 해낸 것일까.
한국일보는 자세한 사연과 실태를 들여다보고자 아스티팔레아로 향했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배로 9시간쯤 떨어진 섬, 아스티팔레아는 하얀 건물을 빼곡하게 품은 채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청량음료 광고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광은 섬의 자랑이다.
아스티팔레아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산토리니와 풍경이 비슷해 '새로운 산토리니'라고 불린다. 섬의 주 수입원 역시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기댄 관광이다. 주민 5분의 1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주민들의 삶 역시 풍요로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관광이 주요 산업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이 충분히 유입되는 '부자 마을'은 아니다. 올해 여름 아스티팔레아 방문객은 8,000명 정도였다. 겨울에는 찾는 발길이 뚝 끊긴다. 산토리니엔 연간 200만 명이 찾는다.
아스티팔레아 주민은 1,400명 정도로, 인구도 많지 않다. 투자도 잘 이뤄지지 않고, 인프라도 잘 갖춰지지 않았다. 대중교통이 전혀 없다는 게 단적인 예다. 도로·건물 등도 낡아 곳곳이 훼손된 채 남아 있다. 2010년에 닥친 경제 위기 여파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리스 중앙 정부가 '작은 마을'까지 챙길 여력도 없다.
관광 면에서든, 삶의 면에서든, '더 나은 섬'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마을은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그때 아스티팔레아시 정부가 떠올린 방법이 '금연'이었다.
일단 ①섬에서 담배가 사라지면 관광객에게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많은 그리스 관광객이 "어디서나 담배를 피우는 그리스 문화가 싫다"고 불평한다. '최초의 금연 섬'이라는 명칭만으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②주민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노인 인구가 많지만 의료 시스템은 미흡한 섬에서 건강은 중요한 시정 목표 중 하나였다.
③전 세계적 과제인 '흡연율 감소'의 '테스트 베드'로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덩치가 큰 국가 단위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기 전에 규모가 작은 마을이 먼저 실험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EU는 "2040년까지 흡연율을 5% 미만으로 떨어뜨린다"는 목표를 세웠기에 그리스는 갈 길이 급하다.
④'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흡연은 탄소 배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 생산부터 처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연간 8,0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섬 생태계는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에 특히 취약하다.
시의회는 2018년 "금연 섬에 도전하자"고 결정했다. 이듬해 봄 니코스 코미네아스 현 시장이 선출되면서 탄력을 받았다.
코미네아스 시장은 여행업 종사자들을 찾아 다니며 "호텔, 카페 등 건물을 금연 구역으로 설정해 달라"고 설득했다. 흡연이 일상인 섬에서 유례없는 주문이었지만, 동참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중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팔레오로고스 콘스탄티노포로스씨는 "'더 나은 섬을 만들어 보자'는 시의 의지에 공감해 금연 정책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섬의 주요 해변도 금연 구역으로 지정됐다.
아스티팔레아는 같은 해 9월 오스트리아의 인증 전문 회사 '튀프'로부터 '금연 마을' 인증을 받았다. 그리스에선 최초였다. 마을 곳곳에는 "아스티팔레아에서는 흡연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었다. 시는 홈페이지에도 '그리스 최초의 금연 섬'이라는 문구를 자랑스럽게 적어두었다.
그러나 한국일보가 돌아본 섬에는 여전히 흡연자가 많았다. 식당 바깥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는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담배를 사고파는 데에는 어떠한 제재도 없었다. '금연 인증 섬'이라기엔 어색한 풍경이었다.
시 정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스티팔레아가 받은 인증은 '금연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금연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시 차원에서 금연 장려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금연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인증받을 자격이 있었다. 금연은 여전히 개인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아스티팔레아시는 그럼에도 "성과가 상당했다"고 자부한다. 코미네아스 시장은 "'밥보다 담배가 익숙하다'는 그리스에서 '금연을 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연에 참여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했다. 흡연 인구도 많이 줄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흡연을 대하는 주민들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리 라브리니 아스티팔레아 고등학교 교장은 "과거에는 흡연자들이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면, 이제는 '나의 흡연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을 의식하게 됐다"고 했다.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던 주민들의 습관도 사라지는 추세다.
시와 주민들은 "'100% 금연 섬'이라는 목표를 향해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라브리니 교장은 "담배는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마을이나 국가도 몇 년 안에 흡연율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릴 수 없다"며 "주민들의 저항감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저강도 정책을 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시의 금연 정책 뒤엔 복잡한 문제가 또 하나 숨어 있다. 아스티팔레아는 금연 섬 인증을 받는 과정에서 그리스 담배 회사인 '파파스트라토스'에서 재정 지원을 받았다. 파파스트라토스는 글로벌 담배 회사인 필립모리스 계열사다.
필립모리스는 섬을 전자담배 마케팅에 활용했다. 전자담배는 담배 회사들의 미래 먹거리다. 필립모리스는 섬 한가운데에 있는 상징적 조형물인 풍차에 전자담배 판매점을 설치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금연 섬에서 전자담배가 판매되는 모습은 '전자담배를 피우는 건 흡연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시가 담배 회사와 협력하는 건 "금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담배 회사와 협력하지 말라"는 WHO의 협약을 위반할 소지도 있었다.
시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역설했다. 경제난 탓에 그리스 중앙 정부는 아스티팔레아를 개발하고 개선하는 데 자금을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필립모리스 같은 큰 기업이 섬을 홍보해주는 데 대한 효과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코미네아스 시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욕을 먹지도 않았겠지만, 섬을 발전시키고 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을 시정의 우선 가치로 둘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주민들 역시 시의 결정이 불가피했다는 데 동의했다. 호텔을 운영하는 안토니오스 키라노스씨는 "비판을 감수하고 선택한 길"이라며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게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과정에 흠집이 없어야 한다'는 데만 골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공감대하에서 시는 최근 세계적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과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스티팔레아는 2026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해 '그리스 최초의 탄소 중립 섬'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교체, 전기차 충전소 설치, 대중교통 시스템 구축 등을 돕는 대가로 아스티팔레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제품 광고 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시 공무원 콘스탄티노스 쟈나로스는 "금연과 탄소중립 프로젝트 모두 환경, 건강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결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아스티팔레아의 정책은 완벽하지 않다. 이율배반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흡연자의 천국'에서 '100% 금연'을 향해 발버둥을 치는 모습은 2015년 담뱃값 대폭 인상 이후 별다른 개선책을 내지 못하는 한국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 따라 영업점 내부 진열대에서 담배를 치우고 광고물을 떼는 국가들이 늘었지만, 한국의 국민건강증진법은 여전히 이를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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