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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군사재판이 파행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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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일제 전범으로 기소된 28명에 대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이 1946년 5월 도쿄 일본 육사 건물 강당에서 시작됐다. 재판부는 1948년 11월 전시총리 겸 태평양전쟁 총사령관 도조 히데키 등 7명에게 교수형을, 육군대신 겸 헌병사령관 아라키 사다오 등 16명에게 종신형을,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등 2명에게 금고형을 선고했다. 미 군정청은 12월 23일 사형수 7명 전원의 형을 집행했다.
그로써 일제 침략행위에 대한 법적 단죄가 마무리됐지만, 기소·재판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전쟁의 궁극적 책임자인 일왕 히로히토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난징대학살의 주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등 왕족 대다수도 처벌을 면했다. 당시 연합군 사령부 정보 책임자로 훗날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맥아더의 참모 찰스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은 그 재판을 두고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 진단하기도 했다.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 시로 등 부대 지휘관들도 연구 자료 일체를 미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원 기소를 면했고, 만주국을 이끈 기시 노부스케 역시 A형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알려진 바 약탈 보물과 국가기밀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무죄 방면됐다. 그는 1952년 정치를 재기, 자민당 초대 간사장과 내각 총리를 지내는 등 1979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권력자로 군림했다. 지난 7월 암살당한 아베 신조가 그의 외손자였다.
일제 전범 재판이 파행한 가장 큰 배경은 냉전이었다. 미국은 침략의 과거보다 동아시아 반공 기지로서의 지정학적 가치를 중시했다. 유럽 전선에서는 소련 등 다수 국가가 막대한 피해를 입어 뉘른베르크 재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반면 태평양 전선은 사실상 미군이 도맡았고, 피해국도 승전 지분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1978년 일본 정부(후쿠다 내각)는 처형된 전범 7명과 옥사한 7명 등 14명의 신위를 야스쿠니 신사에 두고, 국가적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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