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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두는 말들

입력
2022.12.2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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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포스터.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포스터.


사전은 ‘난쟁이’를 ‘기형적으로 키 작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 설명한다. '정상인'을 실제 기형, 즉 유전 형질이나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왜소증(일명 저신장증) 증상을 지닌 이들에 비유함으로써 그를 '낮잡는 말'이란 의미다. 저 말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의 ‘꼽추(구루병 증상)’처럼, 19세기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로 인해, 별 거리낌없이 쓰이는 말이 됐다.

동화 원제 ‘백설공주(Snow White)’를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로 알려지게 한 것은 1937년 월트 디즈니의 세계 최초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할리우드 영화업계가 ‘디즈니의 바보짓(Disney’s Folly)’이라고 비웃었다는 그 작품은 1937년 12월 21일 캘리포니아 LA ‘케세이 서클 시어터’에서 개봉됐고, 당일 수많은 영화인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역대급 흥행작이 됐다. 월트 디즈니는 1939년 제11회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고, ‘전함 포템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라 극찬하기도 했다. 영화로의 미학적 성취 못지않게 애니메이션의 예술적·상업적 가능성을 확인시킨 데 대한 평가였다.

192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편당 제작비는 팍스사의 경우 평균 19만 달러, MGM사는 27만 달러 선이었고, B급 영화 제작비는 6만 달러 안팎이었다. 대공황 불황기였고, A-B급 영화 두 편 동시상영 극장 입장료가 약 5센트였던 시절이었다. 오직 그림으로만 영화를 제작하면서 디즈니가 들인 예산은 무려 149만 달러. 1930년의 대작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제작비 120만 달러보다 많았다. 영화는 디즈니 사에 엄청난 수익을 안겼고 돈보다 값진 애니메이션 명가의 명성을 선사했다. 그리고 ‘난쟁이’라는 모멸적 어휘를 일상화했다. 그것이 모멸적인 이유는, 복잡다단한 개인의 면모를 외모의 특징 안에 가둬 버리기 때문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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