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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망했다"에서 "진짜 사랑으로"... 지난하고 치열한 엄마의 삶

입력
2022.12.08 17: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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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소설가 서유미 등
창작자와 엄마, 경계에 선 이야기 담은 '돌봄과 작업'

돌봄과 작업·정서경,서유미,홍한별 등 11명 지음·돌고래 발행·208쪽·1만 6,500원

돌봄과 작업·정서경,서유미,홍한별 등 11명 지음·돌고래 발행·208쪽·1만 6,500원

"나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낚여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해버린 것 같았다, 20년 할부로." 영화 '헤어질 결심'의 시나리오를 쓴 정서경 작가는 첫 아이를 낳고 3주 내내 울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난 망했다, 짧게 잡아도 20년 정도는 망한 거야.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기 행복을 망칠 수가 있구나." 임신과 출산, 그저 '한 명을 우리 가족에 더 초대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던 일은 이전의 삶, 그러니까 오롯이 '나'에게 집중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된 정서경은 "그 이후로 중요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쓰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기진맥진해 어쩐지 텅 빈 것 같았던 가슴에는 사랑이 채워졌음을, 그리고 그 사랑은 또 다른 창작으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아가씨'를 비롯한 이야기들은 그렇게 시작됐다.

책 앞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서수연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는 카페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돌아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린 그림들로 시작된 '퇴근드로잉'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어두운 길을 갈 때' 이다. 서수연 그림

책 앞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서수연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는 카페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돌아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린 그림들로 시작된 '퇴근드로잉'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어두운 길을 갈 때' 이다. 서수연 그림

신간 '돌봄과 작업'은 부제 그대로 일하면서도 '나'를 지키려는 열한 명의 기록으로 창작자와 엄마, 그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는 일도, 양육의 조건과 상황도 다르지만 엄마로서 외로이 겪은 저마다의 사연은 치열하고 뭉클하다.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더라도 누구나 공감할 우리의 이야기다.

'일도 양육도 잘하는 슈퍼맘'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여 성공에 이르는 영웅담은 육아에 어울리지 않는다. 알파 우먼에 대한 기사를 그만 보고 싶다. 아무리 사연을 미화해도 그 삶에 있었을 온갖 고통이 다 읽혀 괴롭다"는 아티스트 전유진의 일갈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책 앞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서수연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는 카페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돌아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린 그림들로 시작된 '퇴근드로잉'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괜찮아'. 서수연 그림

책 앞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서수연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는 카페 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돌아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린 그림들로 시작된 '퇴근드로잉'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괜찮아'. 서수연 그림

대신 "나만 소설을 안쓰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졌다"(소설가 서유미)며 자책해야만 했던 순간들, 혹은 우는 아기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도망가야 했던 때를 떠올리며 "우연히 길에서 책가방 메고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마주치면 예전처럼 무조건 '귀엽다'는 감정이 솟는 게 아니라 '가엾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번역가 홍한별)는 말처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지난한 감정의 파도가 여러 갈래로 퍼진다.

모든 글들에 스며 든 것은 각자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세상 모든 엄마들에 대한 애정과 연대, 지지다. 책을 여는 따스한 일러스트도 사랑스럽다. 책을 덮고 나면 "인류의 수많은 여자들이 이 일을 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양육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과학기술학 연구자 임소연의 말이 새삼 귓가를 울린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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