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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지을 때도 "성평등한가?" 따지는 완벽한 도시가 있다

입력
2022.12.03 14:00
수정
2022.12.03 16:2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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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③
스웨덴 우메오: 젠더 평등 기반 도시 설계

편집자주

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스웨덴 우메오에 설치된 표지판. 여성 보행자를 그려 넣은 게 특징이다. 우메오에도 남성의 모습을 그린 표지판이 대부분이지만 새로운 표지판을 만들 땐 여성을 그려 넣어 비율을 보정해가고 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스웨덴 우메오에 설치된 표지판. 여성 보행자를 그려 넣은 게 특징이다. 우메오에도 남성의 모습을 그린 표지판이 대부분이지만 새로운 표지판을 만들 땐 여성을 그려 넣어 비율을 보정해가고 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성평등은 유럽연합(EU)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도시만 둘러봐도 불평등과 성차별이 만연합니다. 성별에 따라 도시에서 경험하는 게 다르고,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나며, 여성이 차별받는 일이 많지만, 적극적으로 고치려 하기보다는 그냥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웨덴 우메오(Umeå)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시에 '성인지 감수성'이 가득입니다. 성평등 도시의 '모범 사례'입니다."

EU가 스웨덴 북동부 도시 우메오에 보낸 상찬이다. '다른 도시들도 가서 배우고 오라'며 현지 연수 비용까지 지급한다. 비결이 뭘까.

우메오시 관계자들은 "지도에 여성을 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도시 설계와 건축에 물리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성인지 예산이 도시 전체에 집행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가 우메오를 찾아 확인해봤다.

우메오에선 '허투루' 짓는 게 하나도 없다

우메오 중앙역과 시내를 잇는 터널. 조명이 많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밤이지만 환하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 중앙역과 시내를 잇는 터널. 조명이 많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밤이지만 환하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 중앙역에 내리면 역사와 시내를 단거리로 연결하는 보행자 터널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된다. 터널 천장과 벽에는 밝은 조명이 설치돼 있어서 대낮처럼 환하다. 음악도 흐른다. 특급 호텔이나 국립미술관의 로비 같다.

여느 도시의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터널과는 확연히 달랐다. 터널 속 사람들은 타인을 경계하는 기색 없이 목적지를 향해 편하게 걸었다.


구글에 '보행자 터널'이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 터널은 외부 빛이 차단되다 보니, 어두운 경우가 많다.

구글에 '보행자 터널'이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 터널은 외부 빛이 차단되다 보니, 어두운 경우가 많다.

"터널 만드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지난 10월 27일 현지에서 만난 우메오 성평등 정책관 아니카 달렌씨는 이렇게 말하며 '미술관 같은 터널'을 지은 이유를 들려줬다.

우메오시는 10여 년 전 중앙역 주변 도로를 정비하면서 터널을 뚫었다. 시 당국은 '터널 이용자 중 누가 가장 약자인가'를 고민했다. '약자가 만족하는 터널이라면 모두가 만족할 것'라는 생각에서였다.

시 당국은 '터널에서 약자는 여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은 터널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성폭력 등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컸다. 공포감도 남성보다 월등히 많이 느꼈다. 시 당국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터널에 사각지대가 많으면 누가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까 봐 무서워요."

"누가 따라오는 것 같으면 터널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비상구가 없어요."

"터널을 이용하기 싫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가요."



이러한 고충을 해결한 게 지금의 터널 디자인이다. 우메오시는 터널 중간에 외부 도로로 이어지는 통로를 뚫었다. 터널 내부 기둥을 없앴다. 터널 안에 사각지대가 없어지니 '누군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확 줄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우메오시엔 많다. 동부역은 건물 외벽의 대부분을 유리로 세웠다. 건축 준비 단계에서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들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을 줄여 달라"고 요청한 것을 반영해 사각지대를 없앤 것이다.



버스 정류장을 지을 때도 '정류장 구조 때문에 가장 괴로워하는 건 누구인가'를 고민했다. 결론은 이번에도 여성이었다. 달렌 정책관은 "좁은 정류장에 인파가 몰리면 사람들과 바짝 붙어 서 있어야 한다. 먼저 자리를 피하거나 밀려나는 건 여성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메오시는 정류장 공간을 확장했고, 내부에 1인용 공간을 구획해뒀다.

우메오에 있는 '빙'(Being)이라 이름 붙여진 버스 정류장. 널찍한 내부엔 1인용 공간을 두어 누구도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에 있는 '빙'(Being)이라 이름 붙여진 버스 정류장. 널찍한 내부엔 1인용 공간을 두어 누구도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여성을 중심에 두고 도시를 설계한다'는 건 결국 안전한 도시를 만든다는 이었다. 위험·불안 요인을 방치하다가 참사가 터진 뒤 고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다.

여성을 중심에 두니... 안전과 민주주의가 따라왔다

우메오시의 안전은 지표로 증명됐다. 지난해 우메오는 스웨덴에서 '인구 10만 명당 범죄 신고 건수가 가장 적은 도시'에 올랐다. 스웨덴 국영연구소 라이즈의 알버트 에드만 선임프로젝트매니저는 "도시 디자인만으로 '100%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안전할 가능성을 높이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안전은 그 자체로 도시의 자산이다. 시민들의 높은 만족도와 삶의 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이클 버글룬드 우메오 시의회 건설위원장은 "삶의 질이 올라가면 인구 증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우메오시의 인구는 13만224명(2020년 기준)인데, 매년 1%대씩 늘고 있다. 버글룬드 위원장은 "공공장소에서 별로 위험을 느끼지 않는 백인 중년 남성인 나에게조차 성평등 도시 설계는 여러 분야에서 무조건 이득"이라고 말했다.

성평등 도시 디자인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야넷 오그렌 우메오 부시장은 "도시를 만들 때는 기득권자의 목소리가 주로 반영되는데, 대부분 남성"이라며 "이를 보정하지 않는 건 불평등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로 표지판에 보행자와 운전자가 남성으로 그려져 있고, 사람 이름을 딴 도로명 대부분이 남성 이름인 것은 성차별이 누적된 결과다. 우메오시는 이것 역시 적극적으로 고치고 있다.

마이클 버글룬드(왼쪽) 우메오 시의회 건설위원장과 야넷 오그렌 우메오 부시장.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마이클 버글룬드(왼쪽) 우메오 시의회 건설위원장과 야넷 오그렌 우메오 부시장.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관성 따르는 대신 논쟁을! … "비효율? 발전 위해 필요"

우메오시는 도시 곳곳에 깃든 보이지 않는 차별의 사례를 발굴해냈다. 버글룬드 위원장과 달렌 정책관에게 대표적인 사례를 들었다.

#사례 ① 눈이 펑펑 내린 어느 날 자동차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려는데 누군가 물었다. "왜 자전거 도로보다 자동차 도로가 우선인가요? 자동차 운전자는 남성이, 자전거 운전자는 여성이 많아요. 그렇게 하면 여성이 사고를 당할 위험이 커지는 거죠." 우메오시는 '어떤 도로의 눈을 먼저 치우는 게 더 많은 시민을 안전하게 하는지'를 검증했고, '자전거 도로'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때부터 자전거 도로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사례 ② 우메오시는 청소년 전용 스케이트장을 지었다. "스케이트는 주로 남성이 탄다"는 편견 때문에 남성의 체형과 취향에 맞춘 설계를 했다. 누군가 "여성은 스케이트를 원래 타기 싫어하나요? 아니면 못 타는 건가요?"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스케이트 강습 기회를 줬더니 여성들이 열광했다. 이들은 "남성들만 있는 곳에 가는 게 불편해서 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남성과 여성이 모두 편안함을 느끼는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

우메오에 있는 청소년 전용 스케이트장. 당초 '남자 청소년'이 많이 탄다는 이유로 이들의 체형 등을 고려해 지을 예정이었으나, '여자 청소년들이 타기 싫어서 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두 성별 모두를 위한 스케이트장으로 재설계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에 있는 청소년 전용 스케이트장. 당초 '남자 청소년'이 많이 탄다는 이유로 이들의 체형 등을 고려해 지을 예정이었으나, '여자 청소년들이 타기 싫어서 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두 성별 모두를 위한 스케이트장으로 재설계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시는 성차별 시정을 법적으로 보장한다. 우선 성평등 정책관을 2명으로 늘렸다. 유럽의 다른 도시는 성평등 정책관이 없거나 있어도 1명인 경우가 많다. 정책관들은 매의 눈으로 불평등한 요소들을 찾는다. 달렌 정책관은 "우리 업무 상당 부분이 '이게 평등한가요?'라고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메오 시의회에선 평등위원회가 성차별적 행정을 견제한다. 성평등 정책관들과 평등위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놓친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이들의 목소리엔 권위가 실려 있다. 린다 샌드버그 우메오대 교수는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말하면서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은 젠더 평등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라며 "성평등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 덕분에 정책관과 평등위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고 말했다.

우메오시는 학계∙시민단체 등에 "불평등 문제를 제기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오그렌 부시장은 "외부인들은 우리가 못 보는 부분을 잘 발견할 수 있다"며 "이런 자극들이 도시 전체를 발전시킨다"고 말했다. 또 "우메오시가 '모범 도시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부터 추구했던 건 아니다"라면서 "30년 이상 성차별을 시정하며 경험을 축적한 결과 모범 도시가 됐다"고 말했다.

우메오시 성평등 정책관인 린다 구스타프손(왼쪽), 아니카 달렌. 우메오엔 성평등 정책관이 두 명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리를 비워도 공백 없이 시정을 챙길 수 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우메오시 성평등 정책관인 린다 구스타프손(왼쪽), 아니카 달렌. 우메오엔 성평등 정책관이 두 명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리를 비워도 공백 없이 시정을 챙길 수 있다. 우메오=신은별 특파원


작은 성취→큰 성취… "옳은 길이라면, 꾸준히!"

우메오시는 "도시 곳곳에서 '눈에 보이게 된' 성평등이 우리 삶 속에 뿌리내린 불평등을 새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시의 성차별 해소 기능은 시민의 삶 구석구석으로 확장되고 있다.

시 당국은 '지역 보도 채널에 등장하는 인터뷰 대상자는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사회적 발언권이 남성에게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지역 방송국을 설득했고, 방송국은 인터뷰 대상자 성별 비율을 50 대 50으로 맞추고 있다.

우메오시는 시민들의 신용카드 이용 내역을 들여다봤다. '가정용 소비재를 주로 누가 구입하느냐'를 분석해 '가사 노동의 성별 분담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결과 식료품, 생활용품 등을 더 많이 구입하는 건 여성이었다. 이에 시 당국은 시민들의 가사 노동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성평등으로 행복해진 건 여성만이 아니다. 달렌 정책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메오시의 남성 육아 휴직 사용 비율은 스웨덴에서 가장 높다. 다른 도시들보다 특별히 남성 육아 휴직을 독려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도시 전체에 흐르는 성평등 문화 덕분일 것이다."

우메오의 도시 구조물들

우메오의 도시 구조물들





우메오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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