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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혐오한 적 없다”고, 스스로 공정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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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가 만연한 시대다. 그런데도 스스로 혐오주의자라 말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왜일까? 단순히 내 잘못에는 관대해서? 미국 저널리스트 제시카 노델의 신간 '편향의 종말'을 읽어 보면, 혐오나 편견을 자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대다수가 스스로 공정하게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향 사고'로 기울어 혐오와 편견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편향의 실체는 이렇다. 뇌는 범주화, 본질화, 고정관념 형성의 3단계를 거치는데 이 과정에선 보상작용이 따른다. 불확실한 결과를 정확히 예견하면 쾌감을 느낀다. 반대로 고정관념이 틀리다고 생각되면 위협을 느낀다. 한 실험에서 백인 대학생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라틴계 학생들과 교류할 때 비호감을 느꼈다. 라틴계가 가난할 것이란 고정관념과 달라서였다. 이렇게 고정관념에 뇌가 중독돼 편향 사고로 이어진다.
암묵적 편향은 더 위험하다.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편향적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등주의를 믿으면서도 차별적인 행동을 하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의 해결은 더욱 어렵다.
하나의 회로처럼 작동하는 암묵적 편향은 문화적 지식을 흡수할 때 시작된다. 예컨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수학 실력이 우수하다'는 잘못된 정보가 미디어 등을 통해 전해진다. 이 문화적 지식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발언 등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로 차별적 행동이 나타나며 다시 문화적 지식에 '먹이'를 준다. 악의 없이 시작된 암묵적 편향은 사회 곳곳의 차별로 번진다.
책은 “편견을 없애자”는 식의 공허한 조언은 하지 않는다. 대신 편향을 끊을 설계를 제안한다. 스웨덴 유치원에서 이뤄진 교육을 보자. 교사들은 의도적으로 여자와 남자를 나누지 않았다. 이야기 속 등장 인물들의 성별을 뒤집거나 'hen'(스웨덴어로 성별 중립적 대명사)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갖고 노는 장난감 종류를 예단하는 확률이 낮았고, 다른 성별의 낯선 친구와도 잘 어울리려 했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의 범주가 달라진 것이다.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반성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해법을 담은 지침서로 쓸 만하다. 여전히 ‘난 차별한 적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면 저자의 말을 곱씹어보자. “편향은 옷감에 섞어 짠 은실처럼 문화 속에 짜 넣어져 있다. 어떤 빛 아래에서는 환하게 보이지만 다른 빛 아래에서는 알아보기 힘들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인종주의적 발언만 캐치하는 백인과 달리 유색인은 버스에서 자신을 슬쩍 피하는 상대의 미묘한 행동까지 간파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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