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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은 인간의 전유물일까'...AI 예술품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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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이목구비에 짙은 색 코트, 화이트 칼라 차림의 신사. 신비로운 귀족 분위기를 풍기는 ‘에드몬드 드 벨라미의 초상화'는 언뜻 보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 같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 서명이 아닌 수학 공식이 적혀있다. 이 작품은 14세기와 20세기 사이 완성된 1만5,000점에 달하는 고전적 초상화를 학습한 인공지능 GAN(적대적 생성 신경망)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서명을 대신한 수학 공식은 그림을 생산한 알고리즘의 시그니처 방정식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이 2018년에 43만2,500달러(약 5억 원)에 팔렸다는 것. AI가 만들어 낸 미술 작품이 처음으로 경매에 올라 낸 성과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한다. AI의 결과물이 예술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AI도 창의성을 발휘한다고 인정해야 할까. 이 질문에 책 ‘아티스트 인 머신’의 아서 I.밀러는 넌지시 이렇게 조언한다. "창의성이 인간만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자만일지도 모른다."
영국 런던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인 저자는 AI를 둘러싼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시나리오 대신 기술의 창의성이 안겨줄 즐거움을 논한다. 1980년대 영국 그린햄 커먼 핵기지에 배치된 어느 군인과 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울타리 너머’(2016년 상연)는 사랑과 상실과 같은 이른바 ‘히트’ 뮤지컬에 포함된 흥행 요소들을 통계적으로 학습한 알고리즘으로 탄생했다. 관객들은? 긍정적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오히려 히트 뮤지컬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AI 작품의 완성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의 책 ‘사피엔스’ 10주년 특별판 서문도 AI 글쓰기 프로그램 ‘GPT-3’가 썼다. 글의 논리적 일관성은 하라리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같은 AI의 놀라운 결과물에도 논란은 여전하다. 결국은 기존 작품들을 베껴 조합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시각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논쟁적 사안을 두고 창의성의 개념부터 살핀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을 창의성으로 정의하는 저자는 예술도 결국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지식에 의지해 왔다고 말한다. 피카소도 후기 인상파의 규칙 안에서 움직이면서 자기만의 예술을 시작했고, 베토벤도 작곡의 규칙을 따르고 나서야 결국 그 규칙을 깨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창의성의 특징으로 꼽는 것은 자기 성찰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협업과 경쟁, 훌륭한 아이디어의 모방 등 7가지. 아울러 창의성을 구현하는 천재의 2가지 징표는 핵심 문제를 발견하고 연결부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저자는 AI를 활용해 창작 활동을 한 프로듀서, 프로그래머 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컴퓨터는 수준 높은 창의성의 특징과 천재성의 징표를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다만 “기계는 감정이나 의식이 없어서 완전한 예술가로 명명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특히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점인 의식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면서도 의식도 결국 정보와 인식을 결합한 데이터 처리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창의적인 인공지능도 가능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궁극적으로 인간도 '생물학적 기계'라는 주장과 함께.
책을 덮고도 질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창의성이란 개념 자체가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있느냐다. 문화적 맥락에 따라 새로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천차만별이다. 창의성이 단순히 데이터 처리 기술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다. AI 창작물의 저작권을 둘러싼 논쟁도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럼에도 책은 기술적 진보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AI 시대의 여러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원작은 2019년 출간됐다. 한국어판은 비교적 뒤늦게 나왔으나 책의 메시지가 미래를 향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번역을 맡은 김동환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AI가 풀어야 할 문제와 목표가 미해결 상태인 지금도 데이터와 상상력, 그 사이를 잇는 의식 문제를 AI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유효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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