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세상에 색을 부여하는 일"

입력
2022.11.1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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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제5도살장 분서

1979년 무렵의 커트 보니것. AP 연합뉴스

1979년 무렵의 커트 보니것. AP 연합뉴스

1973년 11월 미국 노스다코타의 주민 600명 남짓(당시 기준)인 마을 드레이크(Drake)에 미국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1969) 때문이었다.

마을 공립학교에 갓 부임한 영어교사가 독서 목록에 스타인벡, 헤밍웨이 단편집과 함께 ‘제5도살장’을 포함시켰는데, 책에 욕설과 음란한 구절이 많다는 학부모 항의에 학교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목록 삭제를 의결한 거였다. 한 해 전인 1972년 미시건주 오클랜드의 한 법원이 ‘제5도살장’은 "타락하고 저속하고(…) 반기독교적"이라며 교재 부적합 판결을 한 예가 있었고, 1973년 미주리주 한 공립 교육위원회도 그 작품을 교과과정에서 배제했다. 하지만 드레이크 공립학교는 불필요한 문서 등을 소각하던 관행에 따라 '별 생각 없이' 보니것의 소설 36권을 불태웠다.

그 사실이 ‘분서’라는 제목을 달고 지역 언론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파문이 커졌다. 전국 주요 매체 기자들이 추이를 취재하기 위해 마을로 몰려들었고, 이사회에는 항의 전화가 쇄도했다. 보니것도 이사회 의장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직접 읽지도 않은 책을 불태울 자유가 있다는 썩은 교훈을 학생들에게 가르친 셈이다.”

마을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파시스트 마을’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한 비평가는 책이 금지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레이 브래드버리의 SF 소설 ‘화씨 451’을 언급하기도 했다. 화씨 451도(섭씨 233도)는 불타는 책의 온도다.

2차 세계대전 포로로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보니것의 실험적 반전 소설인 ‘제5도살장’에는 한 인물이 소설의 목적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온통 흰색인 방의 벽에 색을 부여하는 것.” 색의 다채로움을 타락이라 여긴 이들에 의해 ‘제5도살장’은 알려진 바 18차례 ‘검열, 탄압’을 겪었다. 1982년 미연방대법원은 5대 4로 “편협한 당파성이나 정치적 이유로, 학교 당국자가 도서관에서 책을 배제하는 것은 수정헌법 1조 위반”이라 판단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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