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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사망자 중립적 표현? 고관대작의 언어는 중립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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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언어는 중립적일 수 없다. 어떤 단어, 용어를 사용할지 선택하는 그 순간 사용자의 의중과 태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서울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아픔을 더 키운 용어 논란에 국어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한목소리다. "언어는 가장 정치적이다"(신지영 고려대 국문과 교수, 지난 3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는 말도 나왔다. 고관대작들의 경우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중립적이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태원 참사 용어 논란은 지난달 31일 행정안전부가 각 지자체에 발송한 '이태원 사고 관련 지역 단위 합동분향소 설치 협조' 공문에서 제단 중앙에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고 쓰도록 안내하면서 시작됐다. '희생자' '참사'라는 단어를 쏙 빼자 언론과 시민들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고, 정부는 "재난 관련한 용어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고, 유명 관광지인 이태원에 부정적 이미지를 피하려는 취지"(2일 박종현 행정안전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희생자' '참사' 표현을 써도 된다"는 입장을 밝히자, 지방자치단체들도 하나 둘 분향소 현수막을 교체하고 있다.
대형 사건 사고 발생 시 용어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0년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 때 민주당이 피해 여성을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해 문제가 됐다. 조두순 사건은 피해자 가명이 들어간 '나영이 사건'으로 먼저 불리다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명칭이라는 여론의 비판에 뒤늦게 바뀌었다. 왜 이런 논란이 계속 벌어지는지, 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문해력 전문가인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언어, 단어, 용어를 선택할 때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의 의도와 목적이 반영되고, 그 맥락 안에서 의미가 만들어져 수용자에게 전달된다"며 "따라서 가치 중립적(value neutral) 용어는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이어 "대형 인명사고는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그 자체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 경제 등 여러 방면으로 유무형의 결과를 가져오니까 참사로 부르는 게 가장 상식적"이라며 "정부가 특별히 '사고'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언어 통제'"라고 규정했다. 오히려 "이태원 '사고'라고 하면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무질서하게 놀다 우연히 발생했다'고 은연 중에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다"고도 했다.
그는 "일반인은 언어의 파급력이 크지 않고 비공식적 맥락에서 사용하니까 매우 유연해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면 즉시 수정할 수 있지만, 공공과 소통하는 공직자는 그 반대라 유연성이 낮다"며 "네이밍을 할 때 임시성(tentativeness)을 부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희생자나 구조자, 시민 등 여러 관련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이 필요했으나 정부의 의중만 반영해 이 같은 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정부 관료들이 서둘러 내부적으로 용어를 정해버린 과정이 문제"라며 "얼마나 대중이 공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지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언어학을 연구한 백승주 전남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문제의 본질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말라고 금지된 말을 설정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렇게 금기어를 제시해 통제를 따르는지 지켜보겠다는 관점을 내포, 권력을 관철시키려는 방식임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 예로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12월 대선 당선 이후 구성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그동안 사용돼온 '당선자' 대신 '당선인'이란 표현을 사용해달라고 요청한 사례를 꼽았다.
사실 두 낱말은 아무 차이 없는 동의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자'와 '-인' 모두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고 나온다. 앞에 어떤 단어가 오느냐에 따라 붙는 말이 달라질 뿐, '당선자'와 '당선인' 둘 다 민주적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단어였다.
인수위는 "헌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법률에서 '당선인'이라고 표현하고, 중앙선관위원회가 수여하는 증명서도 '당선인증'이라고 불린다"고 취지를 설명했지만, '놈 자(者)'를 사용하면 품격이 떨어져 그런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이후 언론에선 '당선인' 사용 빈도가 부쩍 많아졌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 검색해보면, '이명박 당선인'이 4만2,946회 사용돼 '이명박 당선자'(2만3,439회)보다 훨씬 많았다. '이명박 당선자'는 대선이 치러진 2007년(7,231회)과 2008년(7,134회)에 집중됐고 그 외 기간에는 미미했다.
이는 직전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3만6,750회, 당선인 1만3,608회)과는 정반대다. 2007년 이전까지 모두 합쳐 96회에 불과했던 '노무현 당선인' 표현은 2008년 2,961회로 갑자기 급증한 뒤 많이 사용됐다.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져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5만9,894회) 표현이 당선자(5,758회)의 10배에 달했다.
백 교수는 "민주적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을 지칭하는 중립적 용어 '당선자'가 금지되는 바로 그 순간 비하의 의미를 갖게 됐다"며 "이 금지의 체계가 작동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은 평등한 시민들의 대표가 아닌, 우러러보고 받들어 모셔야 하는 주군과 유사한 존재가 됐다"고 평가했다.
똑같이 중립적으로 사용하던 두 단어가 힘있는 발화자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점을 확실히 보여줬다. '세월호 참사',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등 이전에 쓰여 왔던 '참사(慘事)'라는 용어도, 권력자나 정부가 규정하는 순간에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중립적 표현은 정말 불가능한 걸까?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지난 3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국익과 지역민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사고라고 바꾸는 게 아니라 (아예) 이태원이라는 이름을 빼자고 호소해야 한다"며 "사고든 사건이든 참사든 지역명이 들어가면 그 지역에 낙인을 찍기 때문에 10·29 참사로 하자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조병영 한양대 교수도 "참사는 시간이 흐르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숫자가 붙는다"며 동감을 표했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광주민중봉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 사회적 가치를 재해석하면서 숫자를 붙여 쉽게 기억하고 있다"며 "6·25(한국전쟁), 8·15(광복절)처럼 세월호 참사도 최근에는 (발생한 날에 따라) 4·16을 붙이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앞서 이태원 참사 피해자 심리상담을 하고 있는 한국심리학회는 "지역에 대한 편견과 혐오 방지를 위해 10·29 참사라 부르겠다"고 밝혔다.
백 교수는 "공유경제라는 미명하에 플랫폼 노동자 착취가 가려지고,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이 '세금 폭탄'이란 말에 피해 입는 것처럼 보여지듯, 이태원 참사 용어 논란도 일종의 프레임 짜기"라며 "이번 참사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들여다봐야지 언어를 갖고 줄다리기하는 건 사태 수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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