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걸린 그림

입력
2022.10.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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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에 소장된 피에트 몬드리안의 '뉴욕 시티Ⅰ'. 최근 이 미술관 큐레이터인 수전 메이어뷰저는 이 그림이 그간 위아래가 뒤집힌 채 전시돼 왔다고 주장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에 소장된 피에트 몬드리안의 '뉴욕 시티Ⅰ'. 최근 이 미술관 큐레이터인 수전 메이어뷰저는 이 그림이 그간 위아래가 뒤집힌 채 전시돼 왔다고 주장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추상화의 거장 피터르 몬드리안의 '뉴욕 시티Ⅰ'(1941)은 색 테이프로 구성한 격자무늬로 뉴욕 스카이라인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80년 가까이 거꾸로 걸려 있었단다. 격자가 촘촘한 쪽이 그림 하단이 아니라 상단이란 것이다. 작품을 소장한 독일 미술관의 큐레이터, 수전 메이어뷰저의 주장이다. 최근 전시를 기획하다가 문제를 발견했다며 그가 제시한 근거는 두 가지. 그림이 '바르게' 놓인 화가의 작업실 사진과 프랑스 퐁피두센터에 전시된 또 다른 '뉴욕 시티' 연작의 배치 방향이다. 사실이라면, 이 작품의 '뒤집힌' 역사는 194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모마)에서 첫선을 보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모마는 이미 유명 작가 작품을 거꾸로 전시한 전력이 있다. '야수파 창시자' 앙리 마티스의 말년작 '보트'(1953)가 희생양이었다. 모마는 1961년 47일 동안 이 그림을 거꾸로 걸어놓고 마티스 특별전을 진행하다가 전시 마지막 날에야 바로잡았다. 상하 대칭 구도에 단순한 선과 면으로 표현돼 뒤집어 봐도 어색하지 않은 점도 실수가 오래간 이유였다. 60년이 지나 지난해 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마티스전에서도 똑같은 작품에 똑같은 실수가 반복됐다.

□ '국민 화가' 이중섭의 그림도 '물구나무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8월부터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1954)이 개막 후 두 달 가까이 거꾸로 전시됐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림을 다시 뒤집어 걸면서, 화면 위쪽에 맨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아이는 화면 아래쪽에 내려앉았다. 미술관은 미술계 의견을 받아들였을 뿐 작가 서명이 없는 그림이라 애초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뒤집힌 그림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몬드리안과 함께 현대 추상미술의 양대 거장으로 꼽히는 바실리 칸딘스키는 우연히 거꾸로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고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단순한 색과 선, 형태만으로 예술적 감동을 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메이어뷰저도 '뉴욕 시티Ⅰ'을 계속 거꾸로 걸기로 했다. 중력 방향이 바뀌면 작품이 망가질 거란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이 그림의 역사는 이제 '뒤집힘'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훈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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