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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총재 메시지 전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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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화법은 쉽고 명확하다. 그는 중앙은행의 생각을 시장과 투명하게 소통해야 한다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중시하며 한은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런 이 총재가 지난 15일 돌연 메시지 전달 전략에 대해 “변화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야겠다”고 말했다.
포워드 가이던스란 중앙은행이 향후 통화정책을 시장에 안내하는 지침이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은 비밀을 중요한 가치로 지켜왔다. 하지만 비밀주의는 중앙은행 정보를 먼저 접할 수 있는 대형 은행 등에 대한 특혜로 이어졌다. 이를 고치기 위해 1994년부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가 회의 결과를 몇 분 내에 공표한 것이 포워드 가이던스의 시작이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은 기준금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통화정책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수단으로 포워드 가이던스를 적극 활용했다. 2012년 연준이 “실업률이 6.5% 밑이거나,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2.5%를 넘지 않으면 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공표해 시장의 불안을 없앤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너무 구체적인 약속은 중앙은행의 상황 대처에 족쇄가 된다. 포워드 가이던스 방식은 둘로 나뉘는데, 메시지를 분명하게 표현하면 ‘오디세우스’식, 대강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제시하면 ‘델포이’식이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 중앙은행이 델포이식을 채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행은 두 방식을 절충한다. 이 총재가 지난 8월 미국 ‘잭슨홀 미팅’에서 한국은행의 포워드 가이던스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이 총재는 “비전통적(오디세우스) 정책은 장기금리를 낮추고 경기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시장이 상황의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어, 중앙은행은 상황 급변에 따른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므로 비전통적 정책은 이상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그 대안으로 ‘시나리오 기반 전통적(델포이)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한다. 한은이 지난 7월 사상 첫 ‘빅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을 결정한 후 시장과 소통을 그 예로 들었다. 당시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문에는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만 밝혔다. 그리고 이어진 이 총재 기자회견에서 “국내 물가 흐름이 전망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당분간 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리겠다(베이비스텝)”고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다. 이 총재는 이를 두고 시장이 원하는 최소한의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공하면서도 향후 통화정책 운용의 신축성을 확보하려는 메시지 전달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시장은 이 총재 구상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지난 12일 한국은행이 두 번째 빅스텝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시장에서는 한은이 8월까지도 당분간 베이비스텝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를 자극했고, 결국 쫓기듯 빅스텝으로 선회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런 반응에 이 총재는 ‘물가 경로가 전망을 벗어나지 않는다면’이란 전제를 달았는데, 시장이 이를 간과했다고 답답해했다.
하지만 한은의 메시지가 올바로 전달되지 않은 첫 번째 책임은 이 총재에게 있다. “전망을 벗어나지 않으면 금리를 올리겠다”는 식의 지침은 “길이 막히지 않으면 1시간 내 도착한다”는 내비게이션 안내만큼이나 별 도움이 안 된다. 타이밍이 중요한 시장 참여자로서는 한은 메시지에 담긴 조건은 무시하고 약속에 의지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포워드 가이던스를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탁에 비유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약속의 유용성과 결정의 유연성을 동시에 갖춘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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