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못 알아보게 머리부터 발끝 다 바꾸고 싶어요"... 스토킹 피해자의 '절규'

입력
2022.10.14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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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한 달]
트라우마에 신음하는 스토킹 피해자들
만남 거부하자 가해자는 끊임없이 집착
지켜볼 것 같아 걸음걸이까지 바꿔야 해
비극 막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 용기 내야

6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스토킹 피해자 A씨가 스마트폰으로 스토킹 잠정조치 확정 판결문을 내보이고 있다. 배우한 기자

6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스토킹 피해자 A씨가 스마트폰으로 스토킹 잠정조치 확정 판결문을 내보이고 있다. 배우한 기자

14일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스토킹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다. 사건 발생 후 많은 후속 조치가 뒤따랐다. 초점은 거의 가ㆍ피해자 분리와 강력한 처벌에 맞춰졌다. 하지만 대책의 중심은 피해자가 돼야 한다. 사건은 잊혀도 피해자 마음에 깊게 팬 생채기는 평생을 옥죄는 트라우마로 남기 일쑤다. 직장 동료에게 8개월 가까이 스토킹을 당한 A씨를 6일 서울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고통은 진행형이다.

남일 같지 않았던 신당역 사건

스토킹 가해자가 A씨 지인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A씨를 꾸준히 지켜보며 기록한 관찰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A씨 제공

스토킹 가해자가 A씨 지인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A씨를 꾸준히 지켜보며 기록한 관찰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A씨 제공

“괜찮은 거야? 아무 일 없는 거지?”

지난달 15일 아침 A씨에게 지인들의 안부 메시지가 쇄도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친구는 “혹시 뉴스 못 봤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A씨는 그제야 전날 밤 신당역에서 발생한 비극적 소식을 접했다.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았다. 피해자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았다.

A씨는 한 물류센터의 팀장급 관리직, 가해자 B씨는 협력업체 소속 팀원이었다. 지난해 말 사귀자는 상대방의 갑작스런 고백을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이후 B씨의 병적인 집착이 시작됐다. “내가 널 못 쓰러뜨릴 것 같으냐”며 협박을 일삼았고, 새벽에 일이 끝나면 택시 정류장까지 따라왔다. 한밤중에 수백 번 전화를 거는 일도 다반사였다. 번호를 차단하자 연락처를 바꿔 전화 공세를 이어갔다. 가해자는 A씨를 몰래 지켜본 뒤 ‘관찰일지’까지 작성해 다른 동료에게 보내고, 사귀는 사이처럼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싱글맘’인 A씨는 딸이 걱정됐다. 그가 고소를 결심한 이유다.

법원이 접근금지 결정을 내려 가해자는 출근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한 달 뒤 A씨가 연장 기한을 놓친 게 화근이었다. 협력업체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졌다며 B씨의 출근을 허락했다. 회사에서 두 번이나 가해자를 마주친 A씨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신변보호조치가 연장되자 가해자도 더는 버티지 않고 다른 물류센터로 옮겼다. 검찰은 6월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B씨를 벌금 300만 원에 약식기소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꿨지만...

스토킹 피해자 A씨가 6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며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스토킹 피해자 A씨가 6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며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가해자가 이직한 후 두 사람이 따로 마주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 정상적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A씨의 심신은 망가졌다. 원래 긴 머리였던 그는 가발을 썼다가 최근엔 아예 염색을 했다. 가해자가 아는 옷과 신발도 모두 버렸다. 가방을 4번이나 바꿨고, 마스크는 매일 다른 색깔을 쓴다. 심지어 일부러 다리를 벌리고 걷는 등 걸음걸이에도 변화를 줬다. A씨는 “가해자가 어디선가 지켜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고 했다.

집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폐쇄회로(CC)TV는 물론 출입문이 열리면 스마트폰으로 연락이 오는 자동센서까지 달았다. 그는 “그 사람이 나를 발견해도 못 알아보게 할 수만 있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바꾸고 싶다”고 토로했다.

"스토킹은 중범죄" 인식 개선 절실

지난달 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 마련된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 이한호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 마련된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 이한호 기자

A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스토킹을 여전히 가벼운 범죄로 치부하거나 피해자가 뭔가 빌미를 주지 않았겠느냐는 외부의 따가운 시선이다. “손바닥도 마주쳤으니 소리가 나는 거 아니냐” “좋아해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는 말은 A씨를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나마 직장 동료들과 주변의 도움에 위안이 됐다. 그도 처음엔 다른 스토킹 피해자들처럼 피해 사실을 알리거나 고소를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기를 잘했다. 잠정조치가 일시 해제됐을 때 동료들은 A씨의 출퇴근길에 동행해줬다. 가해자가 보이면 바로 알려주는 동료도 있었다. A씨는 “신당역 피해자는 주변에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처럼 도움을 받았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당역 사건 다음 날 A씨는 출근하지 못했다. 대신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신당역으로 향했다. 10번 출구 앞에는 국화와 추모의 글이 담긴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살아남은 우리가 바꿀게요.’ ‘당신의 몫까지 우리가 서로를 지키겠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도 스토킹 피해를 겪은 지 13년이 됐습니다. 스토킹 피해자들은 계속 싸울 겁니다.’

A씨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피해자의 명복을 빌고 다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나주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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