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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국정어젠다’ 제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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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무례하다” “버르장머리가 없다” “어디서 감히”….
요즘 신구 권력 간 충돌에 등장하는 말은 흡사 조선시대 풍경 같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말싸움의 최전선에 설 경우는 긴장과 열기가 더 생생하게 국민에게 전해진다. 미국 의회든, 한국 국회를 향해서든 ‘이 XX들’이라는 비속어 논란이 단연 그 수위가 가장 높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한 인상을 남긴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은 지난해 9월 19일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 출연을 꼽는다. “대통령이 된다면 이것만은 안 하겠다”를 묻는 대목이었다. 윤 대통령은 “혼밥하지 않겠다”와 “절대로 국민 앞에서 숨지 않겠다. 잘했든 잘못했든 국민 앞에 나서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해석됐다. 올해 2월 15일 대선 출정식 때는 윤 대통령이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는 약속도 큰 소리로 했다.
지금으로선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는 김은혜 홍보수석의 해명이 14시간 만에 나오고, 며칠 뒤엔 같은 문장에서 유독 앞부분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의 추가 설명이 대통령실 관계자발로 이어졌다. 출근길 문답도 뉴욕 방문기간 불거진 논란에 대통령의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예능프로에서 윤 대통령은 “2009년 대구지검 때,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그때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며 가수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부르기도 했다. 김병준 인수위 지역균형위원장이 노무현과 윤석열은 소탈함과 과감한 점이 닮았다고 평했지만, 윤 대통령의 솔직하고 진솔한 ‘형님 리더십’은 국민에게 전해지지 않는 듯하다.
국정지지율이 8월 첫 주에 이어 지난주 또 최저치(24%·한국갤럽)를 찍은 근본적 이유는 이른바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군사정권 청산작업으로 국민에게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는 카타르시스를 줬지만 예외로 치자. 외환위기 극복(김대중), 국민참여시대(노무현), 실용중시·CEO 대통령(이명박), 적폐청산(문재인) 같은 브랜드가 윤 대통령에겐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선거 구호는 국민적 화두에서 사라졌다. 정권 초 국론을 결집시켜 적어도 1년 정도는 시대가 바뀐 것을 체감해야 할 텐데 많은 사람들은 벌써 5년이 길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취임사부터 명확한 어젠다를 던지지 못했다. ‘반지성주의’를 역설해 맹목적 팬덤정치나 편가르기 폐해 등을 지목한 것으로 해석됐지만, 보수진영 원로조차 “무슨 논문 발표하나”라는 지적이 나왔다. 국가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겠다는 건지 실천적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았다. 지난달 유엔총회 연설은 또 어땠나. 구조적으로 변화한 북한 문제를 어필하기는커녕 공허한 ‘자유’만 21번 반복했다. 대통령의 화두가 검사들이 입에 달고 사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나 ‘법치주의’ 강조 외에 한 발짝도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윤 정부는 원점에서 재출발해야 한다. 이미지나 불신은 한번 형성되면 나름의 생명력을 갖는다. 지지율이 이대로 해가 바뀐다면 곧 공무원사회가 말을 듣지 않고 여당에서도 정계개편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내년엔 경제위기가 현실화할 것이다. 최악의 조건에서 위기극복 연정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힘을 받기 좋은 환경이다. 정권이 이 지경에 몰리면 국가와 국민 모두 불행해진다. 대통령이 고정관념과 아집을 버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폭넓게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 혜안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적어도 연말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체적 담론을 제시하고 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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