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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진작 깔 걸 그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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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표를 뽑았다. 예약번호 117번. 아직 식당에 발을 들이지 못한 내 앞 대기자는 32팀이었다. 눈썰미 좋은 내 친구가 식당 안을 흘끗 보고 나와 키득거렸다. "테이블이 총 열한 개야. 저 테이블들이 세 번 회전해야 우리 차례가 온다는 거지." 슬슬 허기가 졌지만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여행은 먹은 기억이 반이다. 바쁜 일 제쳐 두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호구 잡히는 꼴은 겪고 싶지 않았다. "기다렸다 먹고 가자. 우리가 언제 또 이런 줄 서기를 해보겠어."
그러게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동안 식당 예약 앱이라도 가동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친구의 지청구를 귓등으로 넘기며 길 건너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쳇! 백번을 말해 봐라. 홈쇼핑이든 인터넷 쇼핑몰이든 회원 가입한 적 없는 내가 그깟 식당 예약하겠다고 앱을 깔아?' 현금인출기가 처음 도입되던 때 눈앞에 펼쳐진 신개념 '서비스'가 고마운 나머지 무려 6개월간 '현금서비스' 버튼을 눌러 돈을 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얼뜨기 짓을 연출했던 내가 그나마 안전하게 살기 위해 택한 생존방식이었다. 마을 교회를 지나 현무암 돌담 안쪽에 조성된 밭을 구경하는데 '3팀이 남았습니다. 매장 앞에서 대기해주세요'라는 메시지가 폰에 떴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는 순간 알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라는 보말칼국수는 오직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였다.
첫 끼니의 행복 덕이었을까. 9월 말의 제주도는 지금껏 와 본 어떤 시절보다 예뻤다. 밤중에 도착한 일행까지 모여 네 명이 된 우리는 동트기 전부터 늦은 밤까지 섭지코지며 해안 산책로, 산속 휴양림들과 미술관을 걷고 보고 눈에 담았다. 간만에 진짜 여행을 하는구나. 흡사 지중해 마을처럼 푸르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매일 2, 3만 보를 찍은 우리가 마지막 날 간 곳은 사려니숲이었다. 북적이는 산책로를 지나 안쪽 흙길로 한참이나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늦게 도착한 일행이 첫날 내가 갔던 보말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근데 거기 엄청 기다려야 할 텐데."
"앱으로 예약하면 되잖아." 눈썰미 좋은 친구가 말하면서 가방에 넣어 둔 내 폰을 낚아챘다. 자기는 지갑이고 핸드폰이고 다 차에 던져 두고 숲에 들어왔다며 내 폰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모바일 메신저 아이디를 요구했다. "아놔, 내가 바보라서 앱을 못 깐 게 아니라고. 이것저것 정보 내주는 게 싫어서…" 주절거리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아이디와 비밀번호, 생년월일, 은행 계좌번호를 술술 뱉었다. "예약, 끝! 예약번호 147, 대기자 46명. 두 시간쯤 남았으니까 지금 돌아 나가면 딱 맞겠네." 앞으로 쭉 달려가던 그가 덧붙였다. 자기가 주차장에 가서 차를 가지고 올 테니 나머지는 천천히 걸어 나와 숲길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지만 내 폰에는 그토록 주저하던 앱이 이미 설치되고, 나는 또 차가 산록도로를 달리는 중에도 실시간 대기 상황을 메신저로 확인하고 있었다.
타이밍도 기막히지. 차가 식당 주차장에 들어설 때 '식당 앞 대기' 메시지가 떴다. 눈썰미 좋은 친구가 국수를 먹다 말고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래그래, 잘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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