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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필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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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꼬인 실타래처럼 도대체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 적의(敵意)도 발견할 수 없는 말 한마디에 한미동맹 균열을 거론하고, 발언 당사자도 아닌 외교부 장관을 해임하겠다는 장면을 보노라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비속어의 상대방인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펠로시 하원의장이 들었더라도 ‘실없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을 대통령의 실언 한마디가 던진 파장은 실종된 한국 정치의 단면 그대로다.
국민 청력 테스트에 몇 번을 도전했지만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문자로 풀어놓으면 미국 대통령과 국회를 모욕하는 내용인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머금은 윤석열 대통령의 혼잣말에는 어떤 저의도 찾을 수 없다. 도리어 바이든 대통령과 48초간의 어색한 회동을 마치고 나오는 윤 대통령이 참모진의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짐짓 농담성 아이스브레이커(icebreaker)를 던진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XX’라는 단어를 서울 표준어로 구사하는 장면도 욕설과 모욕의 뉘앙스로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방송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인식을 못한 듯하다. 카메라나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실언을 하다 ‘핫 마이크(hot mic)’에 당한 경험은 외국 정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올해 1월 기자회견 도중 무심결에 “멍청한 개자식(What a stupid son of a b---h)”이라는 욕설을 던졌던 바이든 대통령은 취재기자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 현장에서도 다른 정상을 험담하거나 ‘거짓말쟁이’로 비하하는 발언이 hot mic를 타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외교분쟁으로 비화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도 이번 사안에 대해 “(hot mic) 발언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고 넘어갔다.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또한 기계가 증폭시킨 논란에 불과하다. 이 정도 사안을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도리어 악화시켰다.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발언 당사자인 대통령에게 확인하면 그만인 것을 참모들은 15시간 동안 영상자료 해석에만 매달린 채 사태를 방치했다. 무엇보다 발언 내용과 의도의 갈래를 타줘야 할 윤 대통령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 대신 “사실과 다른 보도”라며 핵심을 비껴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대통령실 해명대로 ‘날리면’이라고 우리 국회를 겨냥했다면 유감 입장 표명에 뭉그적거릴 이유가 없다.
대통령의 실언성 마이크 사고에 ‘외교참사’ ‘동맹균열’ 등의 험한 문구를 동원하는 야당의 공세도 지나치다. 나아가 민주당은 영국 여왕 참배 취소와 대일 졸속·굴욕 외교, 대통령 비속어 논란의 책임을 물어 박진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발의했는데, 과연 이 정도 사안이 장관 해임 사유에 해당한다고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대통령 실언이 초래할 동맹균열을 진심 걱정했다면 우리 국회가 윤 대통령을 대신해 바이든 대통령이나 미국 의회에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게 보다 국익을 위하는 방안이 아닐까.
대통령 비속어 발언이 공개된 뒤 거의 일주일째 정치권의 무익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다.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달러당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는 등 시시각각 현실화하는 경제위기 쓰나미는 뒷전이다. 25년 만의 외환위기를 알리는 시그널이 깜빡이는데 언제까지 대통령의 말꼬리만 붙잡고 있을 텐가. 윤 대통령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분명한 방향을 정해서 유감을 표명하고 야당은 장관 해임건의안 상정과 표결을 멈춰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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