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영화를 보는데 졸음이 쏟아져…

입력
2022.09.21 22:20
수정
2022.09.2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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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 건강 칼럼] 정기영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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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은 ‘세계 기면병의 날’이다. 2019년부터 기면병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기면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제정됐다. 기면병은 전 세계적으로 300만 명 정도가 앓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한수면연구학회 역학 조사 자료에 따르면 4만여 명 정도가 기면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면병(嗜眠病)은 낮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졸리는 병이다. 단순히 꾸벅꾸벅 조는 것이 아니라 멀쩡히 있다가도 갑자기 졸음이 생기는 게 특징이다. 수업ㆍ회의ㆍ운전하거나 버스를 탄 뒤 앉기만 해도 갑자기 잠드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졸림 발작’이 나타난다. 웃거나 기분이 흐뭇해지는 등 감정 변화가 생겼을 때도 턱ㆍ어깨ㆍ목ㆍ무릎관절 주위 근육이 힘이 빠지는 ‘탈력 발작’이 나타난다. 이 같은 탈력 발작은 환자의 70~80% 정도에서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말을 못하거나 주저앉거나 쓰러지기도 한다.

기면병 환자는 이 같은 증상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일반인보다 4배 정도 높아 치료하지 않으면 각종 안전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아 조기 진단과 이에 따른 적절한 치료가 중요하다.

기면병은 10대 중ㆍ후반기에 시작해 평생 지속되고, 공부ㆍ업무ㆍ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 환자가 많다. 기면병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진단을 제때 못 받아 10년 이상 남몰래 고통을 받는다. 기면병으로 학교ㆍ직장에서 ‘게으름뱅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등의 오해를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기면병은 뇌 시상하부에서 각성 유지에 중요한 히포크레틴(혹은 오렉신)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는 신경세포 사멸로 발생하는 만성 뇌 질환이다.

히포크레틴은 뇌 각성 중추를 자극해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렘(REM)수면을 억제해 수면 도중 렘수면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도록 조절한다.

그런데 이런 히포크렌틴이 없으면 낮에 각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갑자기 각성 스위치가 수면 상태로 바뀌면서 졸리고, 특히 렘수면 상태로 잠이 오면서 꿈을 꾸는 듯한 환각을 경험한다. 또한 웃을 때 근육에 힘이 빠지는 탈력 증상도 렘수면이 각성할 때 돌출해 발생하기 마련이다.

히포크레틴 신경세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히포크레틴 신경세포에 대한 자가 면역 반응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이 유력하다. 이 같은 가설을 강력히 뒷받침할 만한 사건이 2009년 북유럽에서 발생했다. 당시 북유럽에서 신종 플루 백신을 접종한 뒤 기면병이 급격히 늘었고, 증가하였고, 중국에서도 신종 플루 발생과 연관돼 기면병 발생이 증가된 점 등이 자가 면역 가설을 강력히 뒷받침했지만 연구가 더 필요하다.

기면병은 수면 다원 검사와 다중 수면 잠복기 검사 등으로 진단할 수 있지만 수면 부족, 다른 수면장애 및 수면-각성주기장애 등으로 인한 졸림증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수면장애는 밤에 수면 다원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기면병 진단을 위해서는 야간 수면 다원 검사에서 수면 시간이 충분하고 다른 수면장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이어 아침에 2시간 간격으로 낮잠을 자면서 얼마나 빨리 잠드는지 측정하는 다중 수면 잠복기 검사를 시행해 기면병을 확진한다.

이 같은 밤 수면 다원 검사와 낮 다중 수면 잠복기 검사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환자는 다중 수면 잠복기 검사로만 확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뇌척수액의 히포크레틴 농도를 측정하는 방법이 진단에 도움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검사법이 도입되지 않아 정확한 진단 시스템 구축을 위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기면병은 효과적으로 증상을 조절할 수 있는 치료제가 개발돼 약물 치료로 대부분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기면병의 주간 졸림증 증상은 진한 커피를 많이 마셔도 개선되지 않지만 기면병 약물 치료제는 중추신경계의 각성 중추를 자극해 낮에 각성을 높여 주간 졸림증 증상을 70% 정도 줄여준다. 내성ㆍ의존성 위험이 거의 없고 부작용도 심하지 않아 1차 치료제로 처방되고 있다.

탈력 발작은 렘수면 작용을 억제하는 항우울제 계열 약물이 효과적이다. 약물 치료의 효과를 잘 유지하려면 규칙적인 수면 습관, 충분한 수면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계획적으로 낮잠을 자는 것이 주간 졸림증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고 약 용량을 줄일 수 있으므로, 학교ㆍ직장에서 낮잠 시간을 배려하면 환자가 주간 졸림증을 조절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참 인생 꿈을 펼쳐야 할 시기에 잠으로 인한 생산성 손실은 국가적으로 매우 큰 손실이다. 기면병을 올바로 인식해 기면병 환자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사회적 배려, 정부 차원의 연구 지원이 절실하다.

정기영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

정기영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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