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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을 어디로…전두환도, 정의용도 '강제송환' 골머리[문지방]

입력
2022.09.26 17:00
수정
2022.09.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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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사건과 판박이' 85년 中 어뢰정 사건
'선상반란' 승조원 송환, 대만 인도 관례 깨
북송과 달리 긍정 평가? '법 근거' 차이 때문
이면엔 '한중관계'도… 평면적 평가 어려워
북송 문제는 절차 무시… '법 공백' 고민해야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북송되는 북한 어민의 모습. 통일부 제공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북송되는 북한 어민의 모습. 통일부 제공


사실은 이런 사람들은 애당초 제 판단으로는 NLL(북방한계선)에서 나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정의용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해 2월 인사청문회에서 털어놓은 말입니다. 그는 '탈북 어민 강제북송 사건'이 발생한 2019년 11월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인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습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인데, '차라리 나포하지 않고 북한이나 제3국으로 가도록 유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뜻으로도 읽힙니다.

발언은 여러 해석을 낳았습니다. '북한 선박이 단순 진입으로 확인되면 현장에서 퇴거 또는 송환하라'라는 내용으로 알려진 새 대응 매뉴얼(2019년 개정)을 의식한 것이란 시각이 있는가 하면, '나포 이후 북한으로 보낸 절차에 문제가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옵니다.

분명한 건 그의 말에서 엿보이는 고민입니다. 북한 주민이 나포되는 순간 귀순 의사를 밝힌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정부는 '귀순 의사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다소 모호한 판단을 내세워 강제북송을 결정했습니다.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라 아직은 결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다만 사건 당시엔 정부의 결정을 누구도 섣불리 비판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들이 동료 선원들을 살해하고 도주하던 정황은 뚜렷한 반면, 귀순 절차를 밟을 경우 한국에서 처벌과 관리가 가능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강제송환은 이처럼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넘나드는 사안인지라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 안전과 외교, 법과 인권이 엉켜 있어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37년 전, 우리 정부가 국경을 넘어온 흉악범 처리를 놓고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는 북한이 아닌 중국입니다.

지난해 2월 5일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지난해 2월 5일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85년 어뢰정 사건… '선상반란' 승조원 中 송환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 발생한 '중국 어뢰정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해 3월 21일 중국 해군 소속 고속어뢰정이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통신병 두신리(당시 20세)와 기관병 왕중룽(당시 19세)이 선상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승조원 6명을 살해하고 동쪽으로 항해하다 연료가 떨어져 한국 흑산군도 인근을 표류하고 있었고, 이를 우리 어선이 발견해 한국 해군이 예인했습니다.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 사건 당시 한국 측에 의해 인도된 사고 어뢰정을 예인해가고 있는 중국 구축함. 함상의 중국 수병들이 손을 흔들며 호의를 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 사건 당시 한국 측에 의해 인도된 사고 어뢰정을 예인해가고 있는 중국 구축함. 함상의 중국 수병들이 손을 흔들며 호의를 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는 한중수교(1992년) 이전이어서 양국 간 공식 협상 채널이 없었습니다. 이에 중국은 해군 함대를 이끌고 우리 영해에 무단 진입해 송환을 압박합니다. 중국 군함과 우리 해군 함정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정부는 비상이 걸렸죠. 결국 주한 미국대사관, 일본대사관 등과 협의를 거쳐 중국 외교부에 퇴각 요구를 전했고 중국 군함은 끝내 퇴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뢰정과 승조원, 시신 등의 송환 문제가 남았습니다. 중국은 송환을 원했던 반면, 중화민국(대만)은 "승조원들을 귀순자로 봐야 하며 그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만으로 인도하기를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승조원들 역시 대만 망명을 원했다고 합니다.

우리 외무부 내에서도 중국 망명자를 대만으로 보내던 전례에 따라 처음엔 대만에 무게가 쏠렸는데요. 그런데 논의 끝에 관례를 깨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협상 결과 한국은 어뢰정과 승조원, 시신을 모두 중국에 송환했고 중국은 군함 무단 침입과 관련해 한국에 사과했습니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공식 사과입니다.

북송과 평가는 반대… '법 근거'가 갈라

어뢰정 사건은 여러모로 북송 사건과 비슷합니다. 먼저 북한 어민과 중국 승조원들은 송환되면 사형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죽인 '흉악범'이었으니까요. 실제 이들은 모두 송환 후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뒤 표류하다 한국 당국에 붙잡혔고, 그 후에야 망명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점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건 모두 우리 정부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북한 어민은 한국 땅을 밟을 경우 국민 안전 문제가, 어뢰정 사건의 경우에는 중국 군함과 대치하는 일촉즉발 상황이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중국, 북한과 정상적 외교관계나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우리에게 '반국가단체'이자 평화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당사자이고, 어뢰정 사건 때 중국은 한국의 미수교 적성국이었죠. 당시만 해도 우리는 '자유중국'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가는 딴판입니다. 어뢰정 사건은 대치 상황을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한 사례라는 호의적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중 수교의 물꼬를 텄다며 극찬하는 견해도 있죠. 반면 북송 사건은 논란을 거듭하더니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는 치욕을 겪고 있습니다.

1985년 중국 어뢰정 당시 승조원과 어뢰정 등 인도 협의를 끝낸 해경 258함 함장 김광우(왼쪽) 경감이 중국 측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중국 어뢰정 당시 승조원과 어뢰정 등 인도 협의를 끝낸 해경 258함 함장 김광우(왼쪽) 경감이 중국 측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사해 보이는 '강제송환' 사건임에도 왜 이처럼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법적으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뢰정 사건 당시 '중국 송환' 의견을 낸 김석우 당시 외무부 동북아1과장(전 통일원 차관)은 국제해양법상 해상반란이 일어난 경우 군함의 기국에 강력한 관할권을 인정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중국 관할인 중국 함정에서 사건이 발생했으니, 한국이 피의자 신병을 확보했더라도 중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석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국 소유 선박은 공해, 영해를 막론하고 기국 관할"이라며 "농르풀르망(국제법상 강제송환 금지 원칙)도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강제북송 사건 당사자는 군함이 아닌 민간 어선에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 헌법상 이 같은 국제법을 적용하긴 쉽지 않습니다. 당시 정부도 국제법보다는 출입국관리법 등 국내법에 비춰 북송 여부를 검토했다고 설명했지요.

그런데 이 역시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처벌할 권한을 포기하고 북송하는 것은 북한의 사법권을 인정하는 행위에 가까운 탓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헌법에 어긋나지요. 특히나 어민들이 최소한의 귀순 의사를 표시했다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강조한 헌법 취지에 맞춰 처리해야 했던 사안입니다. 헌법상 북한 주민은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니까요.

이면엔 '한중관계'가… 외교적 결단의 복잡성

여기까지만 보면 두 사건의 잘잘못이 명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비교하고 끝낼 사안은 아닙니다. 어뢰정 사건에서 법이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외교적 정책 판단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국방대 연설에서 최초로 '북방정책' 용어를 사용하며 공산권을 향한 외교에 군불을 지피던 시기였습니다. 중국 역시 덩샤오핑 집권기 들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고요. 앞서 양국은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계기로 서로 협상 가능성을 확인한 상태였는데요. 2년 뒤 어뢰정 사건으로 더욱 신뢰를 다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어뢰정 사건을 지켜본 당국자들이 그간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입을 모아 '중국과 수교의 발판이 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1992년 8월 24일 이상옥(왼쪽) 당시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수교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제공

1992년 8월 24일 이상옥(왼쪽) 당시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수교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제공

이와 달리 과연 한중 양국이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었어도 국제법을 꼼꼼하게 검토하는 적극성과 창의성을 보였을까요? 더 나아가 미중이 1970년대 데탕트와 수교를 거쳐 관계를 강화해나가던 상황이 아니었더라면요? '건국 이래 중국에 받은 첫 사과'와 승조원들의 운명을 맞바꿨다고 하면 마냥 과잉해석일까요? 북송 사건을 두고 가장 많이 나오는 비판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어민의 인권을 희생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같은 잣대를 들이댈 경우 어뢰정 사건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겁니다.

거꾸로 북한 어민들을 돌려보낸 문재인 정부 당국자들은 내심 '외교·안보 영역의 정책 결단이 가지는 복잡성을 이해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북송 어민들이 한참을 도주하다 끝내 붙잡힌 뒤에야 보호신청서에 서명한 점에서 당국자들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형식적 의사 표명만으로 귀순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간첩이라 하더라도 돌려보낼 근거가 없다는 것이 현행법의 아이러니이니까요.

문제는 '일방적 절차'… 법 공백도 고민해야

섣부른 평가가 주저되는 대목입니다.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기본권 보장 원칙과 법에 따라 대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핵심일 텐데 북송 어민, 어뢰정 승조원 같은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순전히 그런 잣대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중국에 맞서 적극적으로 살인 혐의자를 받아들이겠다던 37년 전 대만과, 살인 혐의자의 위험성을 의식해 북한에 돌려보내려 한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느 쪽이 더 기본권 보장에 충실했다고 '무 자르듯' 재단하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탈북 어민 강제북송 사건에 대해선 부적절했다는 쪽에 의견이 모입니다. '회색지대에 있는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들 역시 대체로 동의하는 문제가 있는데요. 바로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결정 과정입니다. △나포 사흘 만에 북 측에 북송 방침을 전달한 점 △별 다른 당사자 소명 절차가 없었던 점 △북송 3시간 전에야 법무부에 관련 법리 검토를 요청한 점 등이 해당합니다.

당시 국회에 출석한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받은 '북송 예정'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다면 더더욱 깜깜히 북송이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전두환 정권마저 승조원들의 중국 송환을 주저했습니다. 외교적 이유가 더 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관례를 뒤집기 전엔 법적 근거를 찾느라 고민했고요.

탈북어민 강제북송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이 지난달 22일 세종 대통령기록관 압수수색을 위해 기록보관실로 들어가고 있다. 세종=뉴스1

탈북어민 강제북송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이 지난달 22일 세종 대통령기록관 압수수색을 위해 기록보관실로 들어가고 있다. 세종=뉴스1

검찰 수사의 초점 역시 바로 이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위법 여부입니다. 향후 수사와 재판 결과를 지켜보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다만 여기에 그친다면 북송 사건이 내포하는 복잡한 고민들을 흘려보내고 정치 공방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법 적용의 회색지대가 많은 외교·안보 정책, 법 테두리를 넘나드는 해외·대북 공작 업무 특성상 비슷한 논란이 반복될 가능성도 큽니다.

북송 사건을 지켜본 정부 당국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법의 공백입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북한에 돌아가겠다는 의사가 없으면 수용해야 한다"고 원칙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가령 북한 주민은 귀순할 자유가 있지만, 한국 국민은 월북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순 희망자의 '선택할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언제까지일까요. 보호신청서 자필 서명 전인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입소 전인지,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흉악범죄 혐의자가 귀순한 뒤의 문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비보호 탈북민'으로 분류되고 형사 처벌 역시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 대한 관리 또는 사회 정착 지원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요.

어뢰정 사건 이후 37년이 지난 만큼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도 성장했습니다. 북송 사건을 통해 외교·안보 영역, 특히 대북 정책 결정의 난점도 고민해 볼 수 있었고요. 앞으로는 국가 안전과 외교, 법과 인권이 뒤엉킨 현실 속에서 '그래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진영논리를 떠나 초당적 고민이 필요한 주제입니다.


정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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