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에 국왕이 웬 말?" 공화주의자 질문에 찰스가 내놓을 답변은

입력
2022.09.17 10:00
구독

찰스 3세 즉위 후 공화정 전환 논의 일지만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굳이 바꿀 필요 있나"
영국 국왕, 통합의 상징 역할 수행할 의무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12일 영국 의회 건물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영국 의회 의원을 만나 연설하고 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12일 영국 의회 건물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영국 의회 의원을 만나 연설하고 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우리가 적어도 찰스보다는 많은 표로 상을 얻었겠지."

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한국산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경쟁한 작품인 '석세션(상속)'의 작가이자 제작자인 제시 암스트롱이 작품상을 받고 단상에서 던진 뼈 있는 농담은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우리 수상이 그분(의 왕위)보다 정당성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라고 자연스럽게 흘려 냈지만, 사실상 새 영국 국왕을 향해 던지는 야유로 들렸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맏아들로서 50년간 왕세자로 살았던 찰스는 모친의 사망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영국 국왕의 지위를 상속했다. 왕위는 원래 그런 자리다. 왕의 가족을 왕족이라 부르며, 이 안에서 왕위 계승 순위도 미리 정해져 있다. 새 영국 국왕에 대한 이의 제기는 추모 분위기 속에서 일단 묻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선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찰스는 모친의 역할을 대체할 적절한 인물인가. 애초에 국왕은 민주국가에 왜 필요한가.

세계 43개 왕국, 그중 15개 나라 국왕 찰스

찰스 당시 왕세자가 6월 24일 르완다 키갈리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영연방은 영국과 영국의 옛 식민지였던 독립 국가들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는 국제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 키갈리=EPA 연합뉴스

찰스 당시 왕세자가 6월 24일 르완다 키갈리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영연방은 영국과 영국의 옛 식민지였던 독립 국가들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는 국제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 키갈리=EPA 연합뉴스

전 세계에서 왕을 국가수반으로 세운, '왕정' 국가는 43개가 존재한다. 이 중 15개국이 찰스 3세를 동시에 국가 수반으로 올려 세운다. 연합왕국(영국)을 비롯해 그레나다, 뉴질랜드, 바하마, 벨리즈,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세인트키츠네비스, 솔로몬 제도, 앤티가바부다, 자메이카, 캐나다, 투발루, 파푸아뉴기니, 호주에서 찰스 3세는 국왕을 겸임한다.

이들 국가에서 국왕은 실권이 없는 형식상의 수장이다. 모든 나라가 헌법에 의해 통치되며 실질적으로는 의회가 실권을 가지는 입헌군주정으로 분류된다. 정부를 이끄는 실질적 수장은 총리이며,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기 때문에 지도부나 정권 교체도 잦은 편이다. 영국 정치 방식을 가져다가 정부를 수립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 의회 건물이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에서 따온 '웨스트민스터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럽의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룩셈부르크, 벨기에, 스웨덴, 스페인에도 국왕이 존재하지만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부탄, 일본, 캄보디아, 태국도 정부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왕이 상징적인 존재로 실제 정부와는 분리돼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왕실이 국정까지 주무르는, '절대왕정'이라 부를 만한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소수에 불과하다.

호주·캐나다·뉴질랜드... 왕 모시는 이유는 '무관심'

앤서니 앨버니지(가운데) 호주 총리가 14일 엘리자베스 2세를 기념하는 명칭을 붙이게 된 호주 시드니의 광장을 확인하고 있다. 앨버니지 총리는 호주의 공화국 이행을 위한 내각 각료를 임명했으나 그의 정부는 찰스 3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시드니=AP 연합뉴스

앤서니 앨버니지(가운데) 호주 총리가 14일 엘리자베스 2세를 기념하는 명칭을 붙이게 된 호주 시드니의 광장을 확인하고 있다. 앨버니지 총리는 호주의 공화국 이행을 위한 내각 각료를 임명했으나 그의 정부는 찰스 3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시드니=AP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가 승하하고 찰스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 국왕을 자동적으로 국왕으로 모시는 국가들이 공화국으로 대거 전환하는 게 아니냐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움직임이 나타날 기미는 없어 보인다.

한 예로 호주의 여론조사업체 로이 모건이 지난 13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현행 입헌군주 체제를 지지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연령별로는 50∼64세의 67%, 65세 이상의 61%가 군주제를 지지했다. 호주에선 1999년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묻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찬성 45% 대 반대 54%로 부결된 바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찬성이 반대를 앞서지 못하고 있다.

굳이 먼 타국의 국왕을 국가수반 자리에 내버려 두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굳이 바꿀 필요가 없어서"다. 왕실과 관계를 끊으려면 국민투표를 진행해 헌법을 개정하고, 국가 수반도 따로 선출하는 등의 번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민생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공화정 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화주의자'로 부르는데, 이들의 적은 왕정을 수호하자는 이들이 아니라 무관심 그 자체다.

일부 공화주의자들조차 기본적으로 "필요하긴 한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라는 태도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내 생애 안에 뉴질랜드는 공화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아던 총리만이 아니라 과거 여러 뉴질랜드 총리가 공화주의적 입장을 자처했지만 실제 공화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다.

먼 나라 국왕에게 국가수반을 맡기는 것이 국가의 정책 추진에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다. 왕정 유지를 원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 가운데 "미국처럼 될 것 같아서"라는 응답도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미국 대통령이 폭넓은 권한을 지니지만, 의회의 다수당과 충돌하는 '분점 정부' 상태가 될 경우는 외려 정책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통합의 상징으로 존재 의의 찾은 국왕들

엘리자베스 2세는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5년 영국군 후방지원부대에서 복무하며 운전 및 정비를 담당했다.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자료

엘리자베스 2세는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5년 영국군 후방지원부대에서 복무하며 운전 및 정비를 담당했다.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자료

현대 국가에서 '왕정이 복고'된 사례로는 캄보디아와 스페인이 있다. 양국 모두 최종적으로는 입헌군주정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통합된 국가를 복원한다는 의미로 왕을 올려 세웠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 정권과 베트남의 침공으로 수립된 과도 정부 시기를 지나, 내전 세력 간 평화 협정이 이뤄지면서 과거 국왕이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을 다시 수장으로 세웠다.

스페인의 경우,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후계자로 원래 스페인의 국왕 혈통인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지목, 국왕 자리에 올렸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독재정을 유지하는 대신 입헌군주정으로의 전환을 택했다. 총선거를 실시했고 새 헌법을 제정하도록 했으며, 1981년에는 친프랑코 성향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도 이를 막아섰다. 국왕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거듭난 것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이런 면에서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국왕이었다.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왕위 계승자임에도 후방지원부대(ATS)의 일원으로 참전해 직접 트럭을 운전하고 정비했다. 군 복무 경험은 국가의 지도자이자 모범으로서 여왕의 발언권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찰스 3세를 비롯해 그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 해리 왕자 모두 군 복무 경험이 있다.

영국 식민지가 차례로 자치권을 얻어 독립하고 영국의 영향력이 서서히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 소속 국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영국을 대표하고 왕실의 의의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굳이 말년을 스코틀랜드 밸모럴궁에서 보낸 이유 역시, 최근까지 이어진 스코틀랜드의 독립 운동을 의식하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4개국으로 이뤄진 '연합왕국'의 구심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인기 없는' 찰스, 모친을 배워야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12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홀리루드궁에서 앨리슨 존스톤 스코틀랜드 의회 의장 접견을 앞두고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 킬트를 입은 채 대기하고 있다. 에든버러=AP 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12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홀리루드궁에서 앨리슨 존스톤 스코틀랜드 의회 의장 접견을 앞두고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 킬트를 입은 채 대기하고 있다. 에든버러=AP 연합뉴스

찰스 3세는 모친과 여러 모로 다른 성향으로 평가된다.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찰스는 왕세자 시절부터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와의 이혼, 그 원인이 된 현 왕비 커밀라와의 관계 등 사생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공개적인 발언과 행동이 잦은 점도 영국 내외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 반대 시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공권력의 행동이 눈에 띄면서 반감이 고개를 들 조짐을 보인다.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가 영국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의 활동에 대해 77%가 "매우 잘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반면 찰스 3세에 대해서는 39%만이 "매우 잘할 것"이라고 답했는데 이는 기대치가 상대적으로 낮음을 암시한다.

현대 민주국가의 왕실은 실권은 없이 유명인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그만큼 대중의 비판에 쉬이 노출된다. 정치적 책임도 요구된다. 찰스 3세는 강한 부정 여론 앞에서 왕실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에게 최고의 롤 모델은 결국 왕으로서 "매우 잘했던" 모친 엘리자베스 2세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헌법연구소는 모든 현대 민주국가의 국왕(사실상 영국 국왕)을 향해,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불렸던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호화 생활로 구설수에 오르자 2014년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줘야 했고, 이어 2020년에 공금 횡령 스캔들이 터지면서 도망치듯 자국을 떠나는 신세가 됐다.

헌법연구소는 "군주제가 얼핏 보면 민주정의 정반대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군주제의 지속 여부는 그 지원을 결정하는 국민들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제시한 '성공 비법'은 다음과 같다. ①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라. ②부패와 스캔들을 피하라. ③왕실의 규모를 줄이되, 공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유지하라. ④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왕족(예를 들면, 해리 왕자 부부)들의 왕가 밖 삶을 지원하라. ⑤군주로서 국민들에 대한 책임을 직시하고 시민사회를 지원하라.

인현우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