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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낙동강전투의 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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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석적읍 망정리와 성곡리 경계의 ‘숲데미산(또는 수암산, 518m)’은, 한국 현대사에서는 해발고도보다 높다란 존재감을 지닌다. 6·25전쟁 낙동강 전선의 운명을 가른 ‘다부동 전투’의 승부처가 그 봉우리였다.
북한군은 개전 열흘 만에 한강 방어선을 돌파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미군 본대 투입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군과 미8군 일부는 금강을 제2방어선으로 획정해 버텼지만 7월 중순 패퇴했다. 대구와 부산을 감싸 안은 낙동강 전선은 한국전쟁의 마지노선이었다. 국군 1사단과 미 24사단이 북한군 주력 3개 사단과 약 한 달여간 그 전선에서 대치했다. 경북 왜관에서 영덕에 이르는 산악 지역은 국군이, 왜관에서 마산에 이르는 낙동강 본류는 미군이 담당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는 방어와 반격의 마지막 교두보인 낙동강 사수의 의지를 “Stand or Die”란 명령으로 천명했고, 북한 김일성은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전했다.
낙동강 전선은 전쟁 발발 이후 미군과 국군이 방어선을 연결해 북한군과 대치한 첫 전선이었다. 수적 우위의 북한군이 전선을 우회해 측면 또는 후방 포위 공격을 하기 힘들어졌다는 의미였다. 방어선 일부가 뚫리더라도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 교통망 덕에 군수품과 예비 병력 지원도 용이했다. 북한군은 한국군 전선을 돌파해 미군을 우회 공격하기 위해 칠곡 인근 전선에 전력을 집중했다. 이른바 8월 대공세였고, 가장 뜨거운 격전지가 다부리(당시 지명은 다부동)였다. 미8군 예비대의 지원을 받은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 8월 29일까지 약 25일간 다부동 전선을 사수했다. 사상자만 한국군과 미군 약 1만여 명, 북한군 2만4,000여 명에 달했다. 8월 대공세의 실패로 북한군 기세가 한풀 꺾였고,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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