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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숨진 날이 '인도주의자의 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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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외교관이 국가 민족 개인의 이해를 넘어, 또 국제외교 권력 관계에 휘지 않으면서, 평화 협력 인권의 이상을 추구한다는 건 이상론이기 쉽다. 하지만 그 이상이 빛은 바래도 아예 탈색되지는 않을 수 있는 것도, 저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극소수 이상주의자들의 헌신 덕이다. 이상주의(자)에 대한 냉소와 폄하가 조금이라도 유의미하려면, 스스로에 대한 냉소가 위선적으로라도 덧칠돼 있어야 한다. 그게 윤리적 책임이다.
브라질 출신 유엔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디 멜로(Sergio Viera de Mello, 1948.3.15~2003.8.19)의 삶과 죽음은 한 이상주의자의 성취와 한계를 엿볼 수 있는 예다. 그는 외교관 아들로 태어나 유엔의 위상과 이상이 드높던 시절 성장했고,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68혁명의 거리에도 섰던 인물이다. 조국의 군사정부를 지원하던 샤를 드골 정권을 고발하는 글을 프랑스 좌파 저널 ‘Combat’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 유엔난민기구(UNHCR)에 취직했다.
그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듬해 수단 내전, 1974년 키프로스 분쟁 등을 비롯해 코소보 내전, 유고 전쟁, 동티모르 사태, 이라크 전쟁 등 1970년대 이후 유엔이 간여한 국제사회의 거의 모든 분쟁 재난 현장을 누볐다. 베트남 전쟁 난민을 비롯, 199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피란민 30만여 명의 재정착 협상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끌었고, 보스니아-세르비아 양측을 오가며 휴전 협상을 주도했다.
그는 유엔 안보리 승인 없이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의 유엔특별대사로서 미국의 입장에 반해 이라크 자치정부의 조기 출범을 위해 애쓰다 알카에다의 폭탄테러에 희생됐다.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품격”이란 말로 세르지우를 평했다. 유엔과 세르지우 추모재단은 그의 기일인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자의 날’로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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