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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으로 풀어낸 설산 조난 산악인의 극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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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고산을 목숨 걸고 오르는 산악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경비와 노력이 들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빙벽에 피켈을 꽂는 이유는 무얼까.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가 여러 산악인을 대신해 이미 이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말로리 역시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다 산에 묻혔다.
연극열전 시즌9의 세 번째 작품 '터칭 더 보이드'는 산이 있어 그곳에 오르는 산악인 사이먼 예이츠와 조 심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전문 산악인이 산을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대규모 등정대를 꾸리고 셰르파의 도움을 받아 여러 개의 캠프를 설치하면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극지법 등반. 반면 알파인 등반은 최소한의 장비와 식량을 직접 짊어지고 셰르파와 산소통 없이 짧은 시간에 정상을 오르는 등반 방식이다. 사이먼과 조는 알파인 방식으로 페루 안데스 산맥의 시울라 그란데 서쪽 빙벽을 등정하고 하산하다 사고를 당한다.
연극 ‘터칭 더 보이드’는 조의 경야(經夜·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지인들이 관 옆에서 밤을 새워 지키는 일)로 시작한다. 산에 마련된 조의 경야 자리에 조의 누이인 새라가 방문한다.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갔으니 됐다는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새라는 폭발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갖는 바로 그 의문을 품는다. "도대체 구조되는 것이 불가능한 험한 산을 목숨을 걸면서까지 왜 오르는가." 새라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산악인의 정해진 대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작품 전반부는 조와 함께 한 팀이 돼 산에 올랐지만 혼자 살아 돌아온 사이먼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사이먼은 분노에 찬 새라에게 산을 오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시켜 준다. 새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동생의 죽음,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자일을 차고 '미친 짓'을 잠시 경험한다. 사이먼은 새라에게 조와의 만남부터 사고가 있던 그때의 상황을 들려준다. 2인 1조가 돼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산을 오르는 조와 사이먼의 등정은 무대에서 연극적 방식으로 재현된다. 험난한 시울라 그란데를 등정하고 조가 부상을 당하는 과정은 거대한 설산을 연상시키는 비스듬한 두 개의 판과, 낭떠러지를 연상시키는 판 사이의 공간을 배우들이 오가며 박진감 넘치게 보여준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소재였지만, 작품은 웅장한 비주얼과 스릴보다는 험준한 산에서 위기를 만날 때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조와 사이먼의 선택에 집중해 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는 조를 위해 90m의 긴 로프에 서로의 몸을 고정한 사이먼은 자신이 버팀목이 돼 조를 절벽 아래로 내려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빙하까지의 깊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어 조는 허공에 떠 있게 된다. 내려 보낼 수도 없고, 다시 끌어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1시간 30분을 버틴 사이먼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새라는 사이먼의 결정을 비난한다. 그러나 사이먼 대신 줄을 잡게 되는 새라 역시 다른 선택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후반부는 모든 이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친 다리를 끌고 캠프로 돌아오려는 조의 분투가 펼쳐진다. 산에 버려진 조는 장비와 양식은 떨어지고 어느 지점,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채로 피곤과 외로움, 고통 속에 놓인다. 하지만 조는 포기하지 않고 생각하고 선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이 새라의 환상이 등장해 조를 응원하고 마침내 조는 포기하고 싶은 여러 고비를 이겨내고 죽을힘을 다해 캠프에 이르게 된다.
실화가 아니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조의 초인적 의지는 감탄스럽다. '터칭 더 보이드'는 산을 오르는 이유와 살아가는 이유를 같은 맥락에 두고 조의 초인적 의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조난 후 조의 캠프 복귀 과정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인적이라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의도한 메시지보다는 블록버스터 소재를 무대에 긴장감 있게 구현한 대중물로서의 재미가 빛난다. 제목 '터칭 더 보이드(Touching the Void)'의 보이드는 큰 산 속에 울리는 숭고하면서도 공허한 울림을 의미한다. 올라가야 만나는 공허한 아름다움, 내려가면 잊힐 이 무모한 등정이 삶을, 그리고 예술을 은유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르는 산악인의 마음을 조금 더 공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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