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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건 뇌세포일까, 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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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딱 20년 전 여름, 우리는 광분 상태였다. 한국 축구가 4강 신화를 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문이다. 문득 그때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런데 웬걸, 어떤 경기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 차도까지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다녔고, 아파트 단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도 함께 질렀는데. 그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다섯 명의 각기 다른 기억의 파편을 조합하니 그제서야 '무슨 경기를 누구네에서 봤다' 정도가 그려진다.
한때 내가 쌓아 온 기억이 곧 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허나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허점투성이다. 신분증과 같은 공식 기록 없이 나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사실 여기서 오는 불안은 SF 장르의 단골 소재다. 계간 미스터리 2022 여름호에 신인상을 받으며 실린 여실지의 '호모 겔리두스'는 이를 미스터리 서사로 섬세하게 그렸다. 냉동인간으로 동면에서 깨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존재의 중심을 고민하게 한다.
'호모 겔리두스'의 배경은 길게는 수십 년간 냉동보존됐다가 나노로봇 인체 해동 기술로 깨어날 수 있는 2052년이다. 냉동인간인 '호모 겔리두스(Homo Gelidus)' 덕분(?)에 출산율이 여전히 바닥인 한국의 전체 인구 수가 오차 범위 3%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주인공 '유다희'는 30년 만에 동면에서 깼다. 일상에 적응 중인 그는 종종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시도 때도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가구를 부수기도 하는 이상 징후를 보인다. 두 번의 심장 이식 이력이 있는 다희는 '심장 기증자가 범죄자였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런 다희 앞에 중년 여성 '라영숙'이 나타나 현실을 뒤엎어 놓는다. 라영숙은 다짜고짜 다희를 '서해미'라고 부르더니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며 뺨을 후려친다. 자신이 '네 엄마'라면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인체 해동 기술을 완성한 정지호 박사가 다희의 해동 과정에서 이상이 발생하자 '바디를 구해서 뇌세포를 이식'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마침 자신을 냉동시켜 달라며 무작정 회사로 찾아온 해미를 보고 다희의 뇌세포를 그의 몸에 이식키로 한다. 해미는 수영 선수로서 기록을 내지 못하면 가해지는 엄마의 폭력을 피해 살 길을 찾아온 열여덟 살 소녀였다.
주인공은 해미와 다희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분명 다희의 어린 시절 기억을 간직하고는 있다. 하지만 수영을 못 하는 다희와 달리 수영장에 빠지자 선수 같은 움직임으로 물살을 가른다. 또 폭력을 가했던 엄마(라영숙)의 기름과 담배 냄새에 불쾌감이 치솟기도 한다. 그의 정체성은 뇌세포에 있는 걸까, 몸에 있는 걸까.
가끔 '천년만년 살고 싶다'는 농담을 한다. 그렇다고 냉동인간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는 글쎄. 수십 년 뒤 덩그러니 나만 살아서 뭐하나 싶다. '내가 나'라는 존재 증명의 실마리는 어쩌면 내 안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바깥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년 전 나의 기억을 나눠 가진 친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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