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전쟁, 고개 든 협상론 배후엔 '현실주의'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장기화 국면이다. 공급 충격이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 즉 '푸틴플레이션(푸틴+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이나 서유럽에선 우크라이나 및 동유럽 국가의 희망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정의' 대신 협상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전쟁 초기에는 '푸틴의 나팔수' 취급까지 받았던 현실주의의 논리가 다시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본격화한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인도적 차원으로 한정해 왔다. 전쟁 초기엔 우크라이나를 향한 군사 지원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비교적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설이 우리 국회에서 열렸을 때도 미온적인 정치권의 관심 탓에 '태도 논란'까지 불거졌다.
하지만 이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확정하면서 미국 등에서 한국에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요구하고, 한국이 이를 수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그런데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 등은 이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 전 원장은 지난 13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났을 때, 미중 갈등이 있는 이때 과연 어느 한쪽을 자극해서 우리의 경제적 이득이 뭐가 있느냐"면서 "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줄타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같은 날 MBC 라디오에 출연해 "러시아와 북한이 전략적으로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면서 "곧바로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하게 되면 우크라이나 분쟁은 한반도로 불똥이 튀게 되는 거다.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야권 인사들뿐 아니라 여권에서도 신중론이 나왔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갈등할 때 표면에서 꺼낸 것은 이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 의원은 "한반도 위기가 고조될 때 러시아와의 협조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면서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방문을) 심사숙고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의 대상자인 이 대표 역시 우크라이나를 방문하긴 했으나, 귀국한 이후엔 신중한 태도를 드러냈다. 지난 10일 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 대표는 "내부에서 종전을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황이 있는 것 같다. 절박하니까 저희한테도 아쉬운 소리를 하려는 느낌이었다"면서 "기대가 큰 것 같아 오히려 부담스러웠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서구가 일치 단결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는 시각과,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말자는 측면으로 나뉘어 있다.
러시아와 실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와 발트 3국은 전자의 입장이다. 대표 주자인 카자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평화협정이 아닌 승리가 목표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확장적 정책에 대해 느끼는 위협의 강도가 크고, 그만큼 절박한 입장이다.
이들은 푸틴 대통령의 영토를 넓히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이 우크라이나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스스로를 표트르 대제에 빗대 "잃어버린 러시아 땅을 되찾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규정하는 미국 내 자유주의 우파 진영의 시각도 이를 지원한다.
후자로 분류된 국가는 독일과 프랑스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에 지나친 굴욕을 줘선 안 된다"고 언론에 밝혔다가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프랑스 여론은 이미 기울었다. 우파 지도자인 마린 르펜과 좌파 지도자인 장뤽 멜랑숑이 모두 마크롱의 발언에 동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선 프랑스의 좌중우 통합이 이뤄진 모양새다.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헝가리, 세르비아, 터키, 이스라엘 등은 섣불리 푸틴 대통령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리적으로 더 떨어진 아시아 국가들의 태도는 대체로 방관이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창설국인 '친미 국가' 싱가포르의 응엥헨 국방장관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민주 대 독재의 이념적 대결로 보지 않는다"면서 "그런 분쟁에 적극 관여할 아시아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난달 31일 뉴욕타임스 기고를 인용해 러시아를 '악마화'하던 미국의 기류가 지난달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지난 13일 TBS 라디오에 출연해 미국이 나토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예비 회원국 2곳(스웨덴과 핀란드)을 얻었으며 푸틴은 충분히 '악당'이 돼 있기 때문에 "미국이 얻을 만한 것은 다 얻었다"고 표현했다.
기고를 보면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국경을 넘어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는 상황이 가능하도록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미군을 파견하거나 러시아군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으로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선을 그었다. 또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최대한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무기를 지원하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상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물밑 협상에 나서달란 메시지라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사실 여론의 기류가 바뀌기 전에도 미국 정부는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뉜 서방의 두 그룹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나토의 통일된 입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개전 초기 독일 등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미온적으로 나올 것을 더 걱정했던 바이든 미 정부 관계자들은 현재는 거꾸로 우크라이나와 발트 국가들의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우려하고 있다. 자칫하면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4월에도 바이든 미 대통령의 중도적 입장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6일 미국 NBC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4월 말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앤서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키이우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발언하자 바이든 대통령이 "표현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고 입단속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되,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노선을 채택한 것은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현실주의란 국제정치가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 쉽고, 힘과 힘의 대결로 이뤄진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전쟁을 옹호하는 것 같다"는 이미지와 달리, 현실주의 학자 가운데는 매(강경파)보다 비둘기(온건파)가 많다. 국제정치에서 '최상의 성과'를 얻기보단 '현재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평화'를 도모하고, 가능한 한 전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설치하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외교 전문가들은 초창기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게 맞지만,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우크라이나의 노선 또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런 입장은 자연히 '친(親)러시아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실주의의 대표 학자로 거론되는 존 미어샤이머 미 시카고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책임이 서방에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글이 인용되면서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주의는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선 지배적인 논리로 작동한다. 지난 9일 본보와 인터뷰한 스티븐 월트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미어샤이머의 분석에 동의한다"면서 "부쿠레슈티 선언(미국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는 발표)이 러시아를 자극했고, 미국과 나토는 최근까지도 우크라이나를 중립국으로 선언하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정치를 다루는 데 있어 현실주의가 유효함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증거로 꼽히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정이 확산하고 서방과 러시아 간 교역 관계가 깊어졌음에도 러시아가 '안보 위협'을 구실로 꺼내 들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트 교수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침략전쟁 역시 중대한 오판의 결과로 본다. 다시 말해, 현실주의적 관점이라고 해서 결코 러시아의 침공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월트 교수는 "러시아가 전쟁의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중립화를 내세우면서도 점령의 의도를 꾸준히 드러냈다"면서 "그 의도를 확장주의, 제국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상, 평화로 향하는 경로도 전쟁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평화 협상장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선 군사적 충돌면에서 러시아를 가능한 한 우크라이나 영토 밖으로 내보내거나 수세로 몰아야 한다. 이 때문에 서방의 군사 지원도 계속된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초기 키이우 지역의 공세를 막아낸 것과 달리 동부 전선에서 수세에 몰렸다는 소식이 나오자,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신형 무기체계 지원을 강화할 계획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월트 교수는 "여전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비해 강하기 때문에 승리를 낙관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어느 시점엔가는 결국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나토 모두 이 전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주의는 흔히 '비(非)도덕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만 놓고 보더라도, 악의적 행동을 한 푸틴 대통령이 현실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이익을 얻게 되고 결국 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조차 정당화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더 큰 것을 봐야 한다고 반박한다. 월트 교수는 지난 13일 포린 폴리시 기고에서 "현실주의는 결코 도덕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다만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희생이 너무 많을 것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지원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다치고, 굶는 것을 잊지 말라는 얘기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