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호 23번’ 최은성을 아시나요

입력
2022.06.17 04:30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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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5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열린 '월드컵 레전드 올스타전'에서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감독이 대전시티즌 창단 멤버 최은성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4월 3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일월드컵 본선에 나설 23명의 최종명단에 기어코 최은성을 집어넣었다. 1971년생인 최은성이 31세 때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요, 프로 무대에서조차 만년 하위 팀 대전시티즌(현 대전하나시티즌)에서만 뛰어 겉보기에 화려한 업적을 내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탁을 다룬 기사 내용엔 ‘깜짝’, ‘행운’, ‘의외’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다.

축구계에선 당시 최은성 자리에 김용대가 발탁될 것으로 봤다. 연세대 출신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까지 지낸, 검증된 자원이었다. 외모도 훤칠해 팬이 많았으니, 떨어뜨렸을 때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았을 터였다. 이운재와 김병지가 주전 골키퍼 경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차기 혹은 그다음 월드컵을 위해서라도 ‘제3의 골키퍼’ 자리엔 유망주 김용대를 발탁해 경험치와 자신감을 높여줘야 한다는 논리도 제법 탄탄했다.

최은성조차도 ‘나보단 용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최종 명단 발표 날 아내와 외출했다고 하니 ‘깜짝 발탁’이란 표현이 반은 맞았지만, 히딩크 감독 속내를 엿보면 나머지 반은 틀린 셈이었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던 김현태 골키퍼 코치가 돌아본 당시 상황은 이랬다.

“난 사실 ‘한국축구의 미래’라며 (김)용대를 추천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선수의 팀 공헌도를 냉정히 따졌다. (최)은성이 공헌도가 참 높았다. 연습경기 때 필드 플레이어가 부족할 때마다 은성이는 골키퍼 장갑을 벗고 구김살 없이 최선을 다해 뛰어줬다. 웬만한 선수들보다 형이자 선배였는데, 항상 겸손하되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히딩크 감독의 최은성 발탁은) 지도자로서 한 수 배울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최종 명단 확정 후 제주 전지훈련에서 최은성은 본선까지 죽자 살자 뛰며 이운재와 김병지를 자극했다. 최은성 스스로가 대표팀 틈바구니에서 좀 못하면 티가 확 난다고 생각해 뜨겁게 노력했고, 후보 골키퍼와 함께 이운재, 김병지의 움직임이 더 좋아졌단 게 김 코치 설명이다. 골키퍼를 포함한 전 포지션 체력과 전술 완성도가 극대화됐고, 결국 한국은 월드컵 4강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훈련 중인 최은성.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추억하는 이들마저도 1번 이운재부터 22번 송종국까진 어렵지 않게 떠올리지만, 본선에 단 1분도 나서지 못한 23번 최은성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때 최은성을 눈여겨본 축구팬이라면 그를 쉽게 잊지 못한다. 월드컵 유산을 안고 프로 무대에 돌아가 최고 리더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2002년 말 소속팀 대전이 재정난으로 해체 위기에 처하자 추운 겨울 선수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서 팀을 지켜달라고 외치며 모금운동에 나섰고, 그 결과 재정 지원이 이어지고 팬들의 관심이 살아났다. 이듬해 대전의 주장이 된 그는 창단 후 최고 성적인 6위를 끌어내며 홈 승률 1위, 평균 관중 1위, 주중 최다 관중(4만3,770명) 기록을 합작해 ‘인생 시즌’을 치렀다.

불혹을 넘겨 정든 대전과 결별, 2014년 전북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땐 이례적으로 대전 팬들도 은퇴식에 참석해 눈물을 쏟았다. 대전 시절 후배들이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된 2011년 본인이 직접 취재진 앞에 서 머리를 조아렸고 대전을 떠나는 과정에서의 섭섭함을 떠벌리기보다 담담히 새 길을 찾은 데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축구팬들이 지금도 최은성을 ‘레전드(전설)’라 부르길 주저 않는 이유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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