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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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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봄날 제비처럼 날랜 몸에 위아래 흰색 운동복을 받쳐 입고는 달리기든 말뚝박기든 노래든 깔끔하게 잘 해내는 친구를 몹시 부러워했다. 언니들이 차례로 물려 입은 새빨간 원피스가 김칫국물 물든 것처럼 바래고 낡은 채 주어져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꼬여 입던 내가, 딱 한 번 옷 투정을 했다. 열 살이었다. "운동복 한 벌 사줘요. 위아래 긴팔 긴바지로 된 것으로요." 조치원장에 가는 엄마의 뒤통수에 대고 울먹이며 소리쳤다. 근사한 운동복만 입어도 친구의 멋짐을 절반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어둑해져서 돌아온 엄마의 장바구니에 고동색 운동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다. 딱 봐도 싸구려였다. 어느 옷가게에서 떨이로 내놓은 것을 깎고 또 깎아서 집어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후진 안목에, 그보다는 착한 딸의 오래된 열망을 이런 식으로 뭉개버리는 얄팍한 모정에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불만족을 발설했다가는 그마저 채가겠다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형제들이 무서워서였다.
막상 입고 보니 헐렁하고 편한 게 영 나쁘지는 않았다. 다소 쌀쌀한 4월 초였지만 4㎞ 넘는 통학 길을 오가기에는 오히려 홑겹 운동복이 나았다. 나일론 재질이라 학교 갔다 와서 조물조물 빨아 오후의 햇살 아래 널면 서너 시간 안에 마른다는 사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교복을 갖춰 입듯 날마다 운동복을 입고 등교했다. 5월이 다 지날 즈음 반장을 하던 진호가 내 등을 쿡 찔렀다. "야, 내가 엄청 궁금해서 말이야." 밀가루처럼 얼굴이 희고 곱던 녀석이 이상하게 웃었다. "뭔데?" "너 이 옷 질리지 않냐?" "편하고 좋은데, 왜?" "몰라서 묻냐? 보는 내가 지겨워서 그런다. 딴 여자애들처럼 예쁜 원피스 좀 입고 다니면 어디 덧나냐?"
어라, 이놈 봐라? 슬슬 반바지로 갈아타려던 나는 한여름이 오기 전까지 그 옷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가고 복더위에 맞춰 민소매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땡볕을 향해 큰절하던 녀석은 9월이 되어 내가 고동색 운동복을 다시 꺼내 들자 경건한 눈빛으로 항복을 선언했고, 아찔한 승리감에 취한 나는 그 아이에게 달고나 한 국자를 사줬다.
물건이든 옷이든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싶으면 닳고 깨져 못 쓰게 될 때까지 고수하는 습성은 그 무렵부터 생긴 듯하다. 같은 용도의 물건 쟁이지 않기, 옷은 샤워할 때 손으로 빨기, 내게 필요 없는 게 생기면 지인에게 선물하기… 하나 둘 체계가 서다 보니 이런 습성이 여러 면에서 꽤 유용하다는 게 드러났다. 때마침 불어온 '미니멀리즘' 트렌드와 맞물려 내가 꽤 잘살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챙겼다.
오늘 우연히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 들어서는 순간 알았다. 고수가 나타났다는 걸. 햇살이 드는 거실은 선방처럼 단출했다. 방 안 두 칸 옷장에는 4계절을 소화할 수 있는 옷이 말끔하게 수납돼 있었다. 게다가 그는, 태도에서든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든 미적 감각에서든, 주변인의 질투와 선망을 사는 셀럽이었다. 자그만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돌아와 나의 공간을 둘러보았다. 너저분했다. 타성에 젖은 내 생활이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어둑해지는 저녁, 벌떡 일어나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이처럼 나도 멋지게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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