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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빈민들의 '부모'였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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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대의에 가려진 민족주의의 추한 이면을 인도-파키스탄의 독립과정만큼 잘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간디가 주도한 힌두교 중심의 인도국민회의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무슬림연맹(지도자 무함마드 알리 진나)을 집요하게 배제하고 차별했다. 영국이 무슬림 국가 파키스탄의 분할 독립을 승인한 뒤 파키스탄의 힌두교도는 인도로, 인도의 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집단이주해야 했다. 무려 1,000만 명에 달했고, 말이 '이주'지 사실상 피난이었다. 종교-민족감정으로 인한 쌍방 테러로 최소 20만 명 최대 200만 명이 숨졌고, 여성 다수가 강간 살해당했다. 잠무-카슈미르 지역 영토 분쟁으로 시작된 그 해 (제1차)인도-파키스탄 전쟁과 별개의 일이었다.
국경을 면한 아라비아해 항구도시인 파키스탄 수도 카라치(Karachi)는 배와 육로로 건너온 이주민들로 순식간에 2,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수용한 거대 슬럼 도시가 됐고, 민족-종교 집단간 폭력-테러사태도 끊이지 않았다. 그 갈등은 세속주의-의회주의자였던 무슬림연맹 지도자 알리 진나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득세로 더욱 악화했다. 파키스탄 제헌의회는 이슬람교 율법인 샤리아법을 최상위법으로 명시한 헌법을 제정했다.
파키스탄 현대사는 알리 진나를 '국부'로 추앙하지만, 파키스탄 시민들이 '아부지(Abu-ji, Daddy)'라 부르는 이가 또 있다. 빈민운동가 압둘 사타르 에디(Abdul Sattar Edhi, 1928.2.28~2016.7.8)다. 저 아수라장 같던 47년의 피난민 중 한 명인 그가, 아시아 최대 비영리 빈민자선단체인 '에디 재단(Edhi Foundation)'을 설립해 파키스탄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한 민간 사회안전망으로 빈민들의 존엄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탱한 거인이다.
가난한 산모들의 출산을 돕고, 버려지는 아이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양 보내고, 가르쳐 취업시키고, 끊이지 않던 전쟁과 테러, 사건-사고 현장의 부상자를 앰뷸런스로 옮겨 치료하고, 가정폭력과 가족들의 천대와 차별을 피해 집 나온 여성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자립 기술을 가르치고, 병원을 지어 정신질환자와 암환자를 치료-보호하며 말기 환자들을 돌보고, 공동 부엌을 꾸려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연고자 없는 시신을 거두어 씻기고 장례 치르고 묻어주었다. 근년에는 다치거나 버려진 동물들까지 챙겼다. 저 기적같은 일을 그가 혼자 시작했고, 가족과 자원봉사자,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급여를 받고 일한 재단 직원들의 힘을 빌어 평생 이끌었다. 그는 인도의 간디평화상(2007)과 서울평화상(2008)을 비롯, 노벨상을 뺀 수많은 인권봉사상을 탔다. 그는 2016년 별세했고, 파키스탄 정부는 50루피 동전에 그의 얼굴을 새겼다.
압둘 에디 뒤에는 항상 아내 빌퀴스 에디(Bilquis Edhi, 1947.8.14~2022.4.15)가 있었다. 66년 결혼한 이래 그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조언자였고, 그의 괴팍한 성정까지 다독인 보호자였다. 남편이 떠난 뒤 재단의 저 모든 일을 도맡은 것도, 무슬림 국가의 여성인 그였다. '파키스탄의 어머니'라 불린 빌퀴스 에디가 4월 15일 별세했고, 파키스탄 정부는 16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향년 74세.
압둘 에디가 귀국하던 무렵 아버지가 운영하던 옷감 도매업은 망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당뇨병으로 몸을 못 쓰는 형편이었다. 그는 연필과 성냥 등을 파는 행상으로 돈을 벌며 어머니를 간병했고, 알뜰히 모은 돈으로 카라치 빈민가 미타다르(Mithadar)에 스무 평 남짓의 작은 점포를 마련했다. 등교하던 어린 에디에게 동전 두 개를 주고는 '하나는 네가 쓰고 다른 하나는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나눠주라"고 당부하며 그를 키운 어머니였다. 1996년 자서전 'A Mirror to the Blind'에 그는 "어머니를 돌보며 나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을 생각했고, 그들을 위한 병원과 공동체를 세울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썼다. 1951년 그는 여유 있는 지인들과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게를 무료 진료소로 개조했다. 병상 예닐곱 개와 작은 사무실을 겸한 그의 집이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훗날 3층 건물을 통째 사들여 산모클리닉과 신생아 및 영아 보육시설을 겸하게 된 그곳이 오늘날 재단 소속 전국 300여 개 진료소와 해외 지부를 총괄 관리하는 본부 건물이 됐다. 66년 결혼한 아내와 4남매의 집도 평생 거기였다.
52년부터 진료소 앞에 '베이비 박스(Jhoolas, baby cradles)'를 두고 버려지는 아이들을 받았다. 박스에는 "아이를 죽게 하지 말고 이 요람에 남겨 주세요. 아이를 살 수 있게 해주세요"란 손글씨 팻말을 붙였다. 그렇게 거두어 기른 아이가 지금까지 약 4만 2,000여 명. 재단은 한 해 평균 250명(총 2만 3,320명)을 입양 보냈다.
세계 인구 100만~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7~58년 인플루엔자 팬데믹 때는 거리에 쓰러져 있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그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그들을 거두어 진료했고, 그 덕에 에디의 진료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해 한 사업가가 기부한 돈으로 그는 낡은 미니밴을 샀다. 그렇게 '앰뷸런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22년 현재 재단이 운용하는 앰뷸런스는 파키스탄 전역에 1,800여 대로 늘어나, 하루 평균 6,000여 통의 환자-부상자 후송 요청에 대응하고 있다. 이용료는 50루피(약 85센트). 총격전을 벌이던 갱단조차 에디의 앰뷸런스가 사상자를 실으러 나타나면 임시 휴전을 할 정도라고, 현지 매체는 소개했다.
파키스탄 정부권력이 군부쿠데타로 엎치락뒤치락하고 부패와 무능이 판치는 동안, 국가가 핵을 보유한 세계 10위권 군사강국이 되는 동안, 그는 정부가 방치하다시피 해온 살인적 빈부격차와 세계 최악의 성차별을 겪는 빈민-여성을 위해 전국 규모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다. 86년 카라치공항 항공기 납치사건 때도, 93년 펀자브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홍수 때도, 65년과 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시가지 포격, 테러 현장에도 에디 앰뷸런스와 자원봉사 의료진이 활약했고, 사태가 발생하면 정부가 먼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76년 카라치 도심 빌딩(Bismillah Building)이 붕괴돼 수많은 사상자가 났을 때도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qar Ali Bhutto) 당시 대통령은 에디의 소재를 확인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압둘 에디는 고집 세고 성마른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그리 순종적인 아이는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자칭 '실용적 휴머니스트'로서 시민들에게도 "내가 여러분을 위해 일하니까, 돈은 여러분이 대야 한다"며 행상 시절 물건을 팔듯이 거리 모금을 다니곤 하던 그였지만, 정치인과 거물 기업인의 후원금은 완강히 거부하곤 했다. "정치 지도자는 거의 대부분 수탈과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이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1978~88 재임) 대통령이 건넨 기부금 50만 루피도 그래서 외면했고, 이탈리아 정부가 제안한 100만 달러도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달았다"며 거부햇다. 그는 어떤 조건이 못마땅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갑부들의 돈을 마다한 까닭도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노예처럼 부려 돈을 버는 큰 강도'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국제재단을 제외한 주요 후원자는 그의 재단 도움을 받은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에디 앰뷸런스 덕에 여동생의 목숨을 구했다며 1,400루피를 기부한 한 남자는 "이 돈이 다른 이들을 구하는 데 쓰일 것이란 걸 안다"고 말했다. 압둘 에디는 파키스탄인의 평상복(salwar kameez)을 두 벌 이상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에디 재단은 후원금의 90%를 사업에 썼고, 나머지 10%로 전국 지부 사무실 운영 및 인건비를 댔다.
에디 재단은 종교도, 민족도 차별 없이 도왔다. 그런 탓에 무슬림 정당과 종교집단의 눈엣가시였다. 힌두교도와 크리스천까지 구하고 치료해주는 그를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은 '배교자'라고 비난했고, 무장단체가 그의 시설을 점거한 적도 있었다. 그들에게 베이비 박스는 성적 타락을 조장하는 반무슬림 행위였다. 압둘 에디는 "나도 무슬림이긴 하지만(...) 내 종교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고, 내가 아는 한 전 세계 모든 종교의 바탕이 인본주의"라고 말했고, 왜 이교도도 돕느냐는 질문에는 "내 앰뷸런스가 당신들보다 더 무슬림(적)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율법학자들이 그는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저주하자 그는 "그런 자들이 가게 될 천국에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가난하고 비참하게 산 사람들의 천국에 갈 것"이라고 웃으며 응수했다.
그가 이룬 기적은 그의 저런 까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박봉으로 그를 도운 의사 등 직원들과 자원봉사자 7,000여 명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 빌퀴스 에디가 있었다.
독립 원년에 인도에서 태어나 역시 카라치로 이주한 빌퀴스는 에디 재단의 간호조무사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그를 만나 66년 4월 결혼했다. 가진 거라곤 낡은 앰뷸런스 한 대와 손바닥만 한 진료소가 전부였던 남자, 무연고자 시신을 거두어 씻기고 공동묘지에 묻어주는 게 일상이던 19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하려는 빌퀴스에게 가족과 친구들은 다들 "미쳤다"고, "그는 데이트도 공동묘지에서 하자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처럼, 에디 부부는 결혼 첫날 밤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실려온 12세 소녀를 간병하며 병원에서 밤을 샜다. 89년 한 인터뷰에서 빌퀴스는 "중요한 건 그 소녀가 결혼해 현재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여성 인권 변호사 아스마 자한기르(Asma Jahangir)를 소개하며 살펴본 것처럼, 헌법 위에 샤리아법이 존재하는 파키스탄의 성 차별은 세계 최악 수준이다. 가족이 허락하지 않은 이성과 교제한 죄로 가족 친지에 의해 살해 당하는 이른바 '명예살인(Honour Killing)' 희생자가, 최고 사형이라는 형법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해마다 최소 1,000 명 이상 발생하는 나라다.
파키스탄 여성 잔혹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버려지는 신생아의 90% 이상이 여아다. 비닐봉지에 담겨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는 시신도 적지 않다. 빌퀴스는 2009년 인터뷰에서 "매주 약 11구의 영아 시신을 수습한다"고 말했다. 베이비 박스의 아이들을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 공부하고 싶어서, 혹은 가정폭력과 명예살인 위협에 쫓겨 피신한 젊은 여성들을 보호하며 직업교육을 시키는 일 등 에디 재단의 여성 관련 일은 빌퀴스가 책임졌다.
남편은 자서전에 "시신을 만지는 건 천한 자들이나 할 일이라 여기는 이들을 혐오한다"고 쓴 남자였고, 7살짜리 장남 파이살(Faisal)에게 무연고 시신을 수습하고 씻기는 일을 거들게 한 아버지였다. 아이들에게 그 완고한 원칙주의자 아버지를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일도 빌퀴스의 몫이었다. 4남매는 모두 재단의 산파-간호교육 등 기초 교육을 이수했고, 다 자란 뒤 아들들은 아버지 일을, 딸들은 어머니 일을 거들었다.
빌퀴스는 고아 아이들을 입양 보낼 때면 언제나 양부모를 직접 면접했다. 결혼한 지 최소 10년 이상 된 50세 미만 부부여야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하고, 부모 모두 술과 약물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게 그가 정한 최소한의 입양 허용 원칙이었다. 그는 양부모 이혼 시에는 엄마에게 양육권을 주거나 아이들을 센터로 되돌려 보낸다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하게 했다.
빌퀴스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남편)와 어떻게 평생 함께 해올 수 있었는지 나도 가끔 의아할 때가 있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아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위급상황이 생겼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갈 사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남편 같은 사람 서너 명만 더 있으면 파키스탄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에 수긍하는 이들도, 대부분 전제를 단다. 그런 이들 곁에 빌퀴스 같은 이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빌퀴스 에디는 1986년 남편과 공동 수상한 '라몬 막사이사이 상'을 비롯, 레닌평화상과 마더테레사 사회정의상 등을 수상했다.
"당신은 내게 기회와 꿈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이임을 영원히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28년 전 버려진 한 여성이 빌퀴스 에디를 추모하며 쓴 글(수정).
심장이 나빠 두 차례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고도 한시도 쉬지 않던 그였다. 사인도 결국 심장 합병증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각각 애도의 글을 발표했다. 미국의 좋은 양부모에 입양 가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나이키 사의 개인정보 보호 및 규정 감독관으로 일한다는 라비아 비비 오스만(Rabia Bibi Osman)이란 이도 SNS에 글을 썼다. 28년 전 카라치의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자기에게 당신 친모의 이름(Rabia Bano)을 주어 보살핀 뒤 새 가정을 선사해준 이가 빌퀴스 당신이라고, "당신 덕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당신 덕에,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파키스탄의 한 소녀가 감히 꿈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에 내가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해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갖게 됐습니다. 당신은 내게 기회를 주고, 꿈꿀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은 빌퀴스 에디이겠지만, 내게 당신은 '바리 암마(Bari Amma, 큰 어머니)'입니다. 당신은 영웅이고, 나같은 모든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인간성의 발전소입니다. 내 이름은 라비아 비비 오스만이고, 나는 영원히 당신의 아이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재단 운영 책임은 부부의 4남매가 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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