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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할머니 역도 하고 싶다" 했는데... 그녀는 너무 일찍 먼 길 떠났다

입력
2022.05.08 17:18
수정
2022.05.08 17:3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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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넘게 활동... 영화계 깊은 슬픔

7일 오후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 있다. 故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제공

7일 오후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 있다. 故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제공

“시어머니든 시할머니든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며 나이가 들고 싶어요.”(2015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월드 스타’의 소박한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도, 시할머니도, 그 어느 역도 연기할 수 없게 됐다. 되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며 한국 영화계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50년 넘게 활동하며 한국인의 마음을 흔들었던 배우 강수연씨가 7일 오후 3시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일 오후 뇌출혈 증세로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의식 불명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지 이틀 만이다. 향년 56세.

3세 때 데뷔.. 아역배우 때부터 스타

아역배우 시절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역배우 시절 강수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풍문여중과 동명여고를 졸업했다. 3세 때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집 앞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와서 ‘너 엄마 어디에 있니?’”라며 손을 잡고 고인을 고인의 집에 데리고 가면서부터다.

공식 데뷔작은 동양방송 ‘똘똘이의 모험’(1971)이다. 아이들이 새총으로 간첩을 잡는다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고인은 ‘이쁜이’로 출연했다. 드라마는 당시 문방구 새총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스크린 데뷔작은 ‘핏줄’(1976)이다. ‘별 삼형제’(1977)와 ‘어딘가에 엄마가’(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등 관객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들로 인기를 모았다. 고인은 TV와 스크린을 바쁘게 오가며 아역 배우로 맹활약했다. 고인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일요일에 쉰 적은 단 2번”이라며 “학교 수업을 위해 일요일에만 촬영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활약상은 청소년기로도 이어졌다.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에서 고교생으로 출연해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청소년 잡지 표지는 고인 사진이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다. 고인은 “고교 1학년 무렵 뭘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영화만 하기로 결심”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영화에만 출연했다.

변방 취급 한국 영화 세계에 알려

강수연이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를 들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수연이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를 들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인이 되자마자 히트작을 내놓았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1985), 배우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등을 거치며 청춘 스타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아역 배우는 성인 배우로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을 뒤집었다. 배 감독은 “워낙 어려서부터 인상적인 연기를 했던 배우라 처음엔 ‘고래사냥’ 1편(1984) 주연 후보에 올려놓기도 했다”며 “할리우드 유명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뚜렷한 미모에 자기 표현력이 명확했던 배우”라고 기억했다.

1987년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아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배우로는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첫 수상이었다.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 변방으로 여겨지고, “(해외 영화제에 가면) ‘북한에서 왔냐, 남한에서 왔냐’ 물어보며 영화보다는 한국에 관심이 많던”(고인 회고) 시절이었다. 고인은 1989년 공산권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당시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로 꼽혔던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가 1980년대 암흑기를 거쳐 2000년대 세계 영화계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고인이 발판 역할을 했다. 국내 언론은 잇단 영화제 수상 이후 고인의 이름 앞에 국내 배우 최초로 ‘월드 스타’라는 수식을 붙이기 시작했다.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 수상 후 옥관문화훈장을 서훈했다.

1990년대 국내 스크린은 고인이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와 ‘베를린 리포트’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지독한 사랑’(1996),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화제작에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 한 많은 조선 여인(‘됴화’), 궁중 암투를 벌이는 장녹수(‘연산군’), 접대부(‘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등 다종다양한 역할을 해냈다. 2001년엔 드라마 복귀작 ‘여인천하’에서 정난정을 연기하며 30%대 시청률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 "내가 먼저 죽었어야"

7일 오후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이 지난해 10월 제3회 강릉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7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자진 사퇴 이후 두문불출했던 고인이 4년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고인이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마지막 행사가 됐다. 연합뉴스

7일 오후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이 지난해 10월 제3회 강릉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7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자진 사퇴 이후 두문불출했던 고인이 4년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고인이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마지막 행사가 됐다. 연합뉴스

2000년대 들어선 문화행정가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1998년부터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2015년 집행위원장으로 위촉됐다. 2017년 위원장에서 자진 사퇴한 후 4년 가까이 대중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제3회 강릉영화제 개막식에 깜짝 등장하며 4년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7월에는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정이’에 출연한다고 발표하며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 올해 공개 예정인 ‘정이’는 고인이 ‘달빛 길어올리기’(2011) 이후 11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극 영화이나 고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영화계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치른다. 김동호(전 부산영화제 이사장) 강릉영화제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공식 조문을 시작하지 않은 7일 밤부터 영화인들이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를 찾은 데 이어 8일에도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봉준호 감독은 8일 빈소를 찾아 "몇 달 전에 봤는데 (돌아가셨다니) 실감이 안 난다. 영정사진을 봤는데 마치 소품 같았다"고 말했다. 고인과 각종 영화제 수상을 합작했던 임권택 감독은 "내가 먼저 죽었어야 하는데 훨씬 어린 사람이 먼저 가니 참으로 아깝다"며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에 내 영화가 더 빛날 수 있었고, 여러 가지로 감사한 배우였다"고 회고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강수연 배우가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을 생각하면 그의 별세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황 장관은 올가을에 정부 차원에서 훈장을 추서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발인은 11일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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