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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이 도덕과 염치를 잃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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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이 많이 읽었던 맹자의 첫 구절은 이(利)와 의(義)에 대해 말한다. 맹자의 방문에 기뻐하여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왕의 질문에 맹자는 다소 까칠하게 "왕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답한다. 옛날 옛적의 고리타분한 일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 정신에 맞게 창의적으로 번안하면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격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사실 올바름, 정의, 도덕, 윤리… 이런 말들이 듣기는 좋지만 때로는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기심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타인과 국가와 사회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매한 이상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사는 현실을 위해 살아간다. 사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도덕의 수준이 사회주의보다 높지 않았던 데 있는지도 모른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자는 집단 농장의 이상은 높았을지 몰라도 현실은 기아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익이 된다면 도덕이나 올바름 같은 건 잠시 뒤로하고 반칙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반칙의 유혹은 그로 인한 이익에 비례하여 커지기도 한다. 이 반칙의 유혹을 막기 위해 법과 처벌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요건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자율과 책임을 원칙으로 작동한다. 시민들이 반칙에 따른 처벌을 두려워할 때보다는 자율적으로 규칙에 따르는 도덕과 염치가 제대로 작동할 때 훨씬 더 차원 높은 자본주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님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보면 정치란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利)를 의(義)를 통해 얻을 수 있도록 돕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도 따지고 보면 과거 의(義)와 이(利)가 서로 상응하지 못하는 데서 왔다고 볼 수 있다.
맹자 말씀을 새기면서 몇몇 새 정부 장관 후보자의 행태를 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넘어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능력이 있으면 약간의 도덕적 흠결은 참을 수 있지 않은가"라는 식의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애당초 장관은 알뜰하게 집안 살림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인 행태는 약간의 도덕적 흠결 정도가 아니며 그 수준의 도덕적 흠결은 공인에게 곧 심각한 무능이기도 하다. 공인의 자격이 없는 이에게 공인의 자리를 주지 않음은 높은 수준의 정의가 아니라 단지 최소한의 상식일 뿐이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정부가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에 철저히 반하는 인물들을 전면에 세우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성숙한 자본주의가 성인군자로 구성된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덕과 염치마저 잃는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 폐해가 넘치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 사실을 새 정부는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염치와 도덕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한 사회의 염치와 도덕이 무너지는 폐해는 회복 불가능할 수도 있다. 새 정부 출범을 맞으며 덕담만 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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